한국 총선거의 진짜 승리자는 누구일까. 국회 탄핵을 받고 청와대에 은신 중인 노무현 대통령? 아니면 원내 과반을 차지한 열린 우리당? 다시 말해서 1년반 전, 진보좌파와 2030세대의 감성적 바람몰이에 힘입어 청와대로 진군한 노무현씨가 아직도 힘의 원천인가. 아니면 40여석의 초라한 의석에서 하루 아침 거대 여당이 된 열린당의 저력인가. 아마 그렇다고 말하는 게 보통의 판단일 것이다.
하지만 나의 의견은 다르다. 한나라당을 무너뜨리고, DJ 슬하를 벗어나지 못한 민주당을 몰아내고, ‘서산을 벌겋게 물들이겠다’며 ‘노욕’을 과시해 온 JP 당을 궤멸시킨, 그 힘의 원천은 다른 데 있기 때문이다.
노무현씨와 그 군단에 승리의 꽃다발을 안겨 준 ‘수훈 갑’은 단연 한국 검찰에 돌려야 한다. 노무현 정권이 들어 선 뒤 미모와 뚝심을 함께 갖춘 여자 법무장관을 정점으로 한 한국 검찰의 리더십은, 그 어느 정권 때보다 능력이 뛰어나고 정치적 감각이 빠르고 민심도 정확히 파악하는 영특한 검찰이라는 평을 듣는다. 한국 정치의 검은 커넥션을 파헤치고 금 배지들을 무더기로 감옥에 잡아넣은 담력은 칭찬 들어 마땅하다.
‘차 떼기’라는 신 용어와 ‘170억 대 0’이라는 수수께끼 같은 숫자를 만들어 낸 것도 한국의 검찰이다.
굴지의 재벌회사로부터 150억 원을 실은 봉고 차를 고속도로 휴게실 주차장에서 넘겨받아 몰고 갔다는,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측의 불법 선거자금 수수 행태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 준 말이 바로 ‘차 떼기’였던 것이다. 이 기막힌 사실을 전해들은 한국 민초들의 마음은 분노로 들끓을 수밖에 없었다. 이회창씨가 ‘감옥에 가겠다’고 나서고, 한나라당 간부들이 석고대죄, 당사를 팔아 돈을 돌려주겠노라고 눈물로 호소했지만 돌아 선 민심은 ‘한나라=부패정당’이라는 등식에서 한발도 옮기지 않았다.
사정이 이렇고 보면 한나라당이 박근혜라는 새얼굴을 내세워 고군분투한들 금시 발복이 가당한 일이었겠는가.
노무현 승리의 또 다른 논공은 한국의 TV방송사들에 헌정해야 한다.
한국 선거에서 TV가 갖는 위력은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 한국에서 유독 TV매체가 힘을 쓰는 것은 여론의 균형추가 없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 아무리 TV가 떠들어대고 선동을 해도 수준 높은 시청자와 견제력 있는 다른 매체가 공존하는 사회라면 문제 될 게 없다.
하지만 ‘공용방송’이라는 문패를 단 한국의 TV들, KBS와 MBC는 막강한 예산과 인력에다 독점 특권까지 만끽하면서 정권 비위 맞추는 쪽으로 여론을 끌고 가는 데 도가 텄다.
정치자금도 그렇고 탄핵문제를 다루는 데서도 KBS와 MBC는 한나라당과 민주당과 자민련을 ‘악의 화신’으로 그리는데 성공했다. 노무현 탄핵 현장에 대한 ‘올인 방송’은 그 절정인 셈이다.
현직 대통령을 국회가 탄핵한 한국 헌정사 초유의 일을 놓고, 어떤 쪽은 ‘사필귀정’이라 했고, 또 다른 쪽은 ‘정권 찬탈 쿠데타’라고 격앙했다. 보는 관점에 따라 그럴 수 있으며, 전 국민 조사를 하지 않는 한, 어느 주장이 우세하다고 판정할 수는 없는 노릇 이다.
한데 두 TV는 탄핵을 의결한 국회 본회의장 현장을 말 그대로 중계 방송했다. 이어 카메라 초점을 광화문 거리로 옮겼다. ‘탄핵반대’, ‘국회 심판’을 부르짖는 군중들의 격앙된 모습을 생중계 해 댔다. 촛불을 든 시위대에 마이크를 갖다대면 도대체 무슨 말을 기대할 수 있는가. 탄핵에 손 든 국회의원들은 모두 ‘죽일 놈’아닌가. 그런 뒤 여론조사를 한들 결과는 뻔하지 않은가.
포퓰리즘이 어떻고, 군중 선동이 어떻고 하는 말들을 많이 들어왔지만, 두 방송의 군중 시위 현장 중계를 보고서야 ‘아하 저 게 바로 그거구나’하고들 생각할 정도였음으로. 정치하는 자들 다 똑 같지--하고 중립을 지킨 이들도 약자인 체 하는 자들의 처량한 표정과 눈물과 한숨이 화면 가득 물결치는 TV를 보면 동화 현상을 일으키는 법이다.
가뜩이나 한국인은 눈물에 약한 백성이 아니던가. 그런 방송이 무려 1주일 가까이 계속됐으니 한국의 여론이 어디로 흘렀겠는가.
차 떼기에, 탄핵 원흉에, 수구반동으로 몰린 한나라당이 악전고투 끝에 121석을 얻은 것은 사실 기적이다. 그 기적의 뒤에는 감성이 휘몰아치는 한국에서 그나마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와 국제사회의 흐름을 이해하는 국민들이 아직은 꽤나 버티고 있다는 증좌일 지도 모른다.
안영모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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