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은 겉으로 보기에는 단순한 게임이다. 규칙이라야 몇 가지 안 된다. 바둑을 생전 처음 본 사람에게도 10분이면 설명이 끝난다. 그러나 고수가 되는 것은 지난한 일이다. 요즘처럼 컴퓨터가 발달한 세상에서도 정상급 기사를 꺾을 수 있는 소프트웨어는 개발하지 못하고 있다.
바둑은 또 겉으로 보기에는 자유로운 게임이다. 가로 19줄 세로 19줄이 만나는 361개 눈 중 어느 곳에나 둘 수 있다. 그러나 바둑을 조금만 배우면 이기기 위해서 둘 수 있는 곳은 제한돼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초반 포석은 물론이고 중반 전투에 들어가면 때에 따라서는 수십 수까지 둬야할 수가 정해져 있는 경우도 있다.
초보자들에게 고수가 가장 경이롭게 보일 때는 판세가 비슷하고 종반까지 수십 수가 남아 있는데도 “반 집이 모자라는 것 같다”며 돌을 던지는 모습이다. 고수가 볼 때 최선의 수를 두자면 판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다.
미국 경제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기관은 연방 준비제도 이사회(FRB)다. 금리와 통화량을 조절하는 재량권을 갖고 있는 FRB는 경제를 망하게도 흥하게도 할 수 있는 힘이 있다. 그러나 이처럼 강력해 보이는 FRB도 사실은 할 수 있는 일이 제한돼 있다. 통화를 안정시키고 인플레를 잡아야 하는 책무가 지워져 있기 때문이다. 물가가 연일 오르는데 “나 몰라라” 하고 저금리 정책을 고수할 수 있는 FRB 의장은 없다.
1970년대 말 미국 경제가 두 자리 수의 인플레로 고통받고 있을 때 카터 대통령은 폴 볼커를 FRB 의장으로 임명했다. 인플레가 기승을 부리면서 달러와 증시가 곤두박질 치고 있는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인플레 매파인 그를 그 자리에 앉히는 길밖에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카터 주변에서는 그를 임명할 경우 금리를 대폭 올릴 것이고 그렇게 되면 경기 침체가 와 재선가도에 빨간 불이 켜진다는 이유로 반대가 있었지만 카터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어차피 물가가 엉망이 되면 재선은 어렵다는 판단에서였다. 과연 볼커는 FRB의장이 된 후 금리를 20%대 가까이 올렸고 그 바람에 인플레는 잡혔다. 그러나 그 바람에 미국 경기는 심한 침체에 빠져들며 실업자가 양산됐고 카터 역시 실업자 신세가 됐다. 볼커는 경제에 관한 한 대통령도 FRB도 하고 싶은 대로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예의 하나로 자주 인용된다.
전문가들은 FRB의 금리 결정을 예고하는 신호로 단기 금리 선물(futures) 시장의 움직임을 주목한다. 아무리 FRB라도 시장의 판단을 마음대로 무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는 금리의 동향을 정확히 예측해왔다. 현재 선물 시장에서는 올 여름 FRB가 금리를 올릴 확률을 100%로 보고 있다. 석유를 비롯한 원자재 값의 폭등, 경기 회복 조짐, 달러화의 약세, 연방 적자의 누적 등이 금리 인상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는 요인들이다. 얼마나 올릴 지는 미지수지만 한번 올리기 시작하면 상당 기간 여러 차례 올리는 것이 상례였다.
미 주택 시장은 지난 수년간 최고의 호황을 맞아 왔다. 자고 나면 오르는 집 값 때문에 너도나도 집을 사려 몰려들고 브로커 수는 급증했으며 미국인들의 주택 소유율도 사상 최고를 기록했다. 그러나 이런 외관상의 화려함에도 불구 부동산 시장이 병들어 가고 있음을 알리는 조짐이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현재 전체 모기지 론의 10%는 신용 불량자를 상대로 한 것이며 신규 대출의 28%는 변동 이자율이다. 40년 래 최저의 모기지 금리에도 불구, 워낙 비싼 집 값 때문에 고정보다 싼 변동을 택하지 않고는 집을 살 수 없는 사람이 많은 것이다. 그러나 변동 이자율은 금리가 오를 때는 주택 소유주의 재정 부담을 무겁게 하는 위험을 안고 있다.
하이텍 버블이 터진 다음 침체에 빠진 미국 경기를 떠받치는 역할을 해온 주택 경기는 이제 하이텍을 뺨치는 버블 양상을 보이고 있다. 금리 인상이 확실시되면서 이에 민감한 주택 건설 회사 주식과 다우 존스 부동산 관리 회사 지수는 폭락세로 돌아서고 있다. 낮은 모기지 금리는 주택 호황 주 요인의 하나였다.
세상에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은 없으며 부동산 경기도 여기서 예외일 수 없다. 주택 버블이 고금리라는 핀을 만날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생각해 보자.
민 경 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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