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호 피칭 관전평>
승리를 잃은 대신 자신감을 되찾았다. 2003년 6월8일 이후 근 10개월만에 마운드에 다시 선 박찬호(텍사스 레인저스)의 6일 밤 피칭은 오늘의 호투가 우리 팀에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며 희망을 걸고 찬호를 지켜보겠다고 한 벅 쇼월터 감독의 말 그대로 잃은 것보다 얻은 게 많은 퍼포먼스였다.
지고난 뒤에는 질문을 건네기가 겁나게 화난 표정으로 입을 닫아버리곤 했던 박찬호 스스로 졌지만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가는 느낌이라고 했을 정도다. ‘먹튀’ ‘돈을 갈아먹는 맷돌’ 등 온갖 치욕적인 언사로 박찬호를 조롱하고 헐뜯었던 댈러스 언론들도 박찬호가 레인저스로 옮겨온 이후 가장 뛰어난 피칭을 선보였다고 모처럼 두둑한 점수를 주는 등 ‘코리안 특급’의 멋진 부활을 믿어 의심치 않는 분위기다.
부상과 부진을 그림자처럼 달고다닌 지난 2년과 가장 달라진 박찬호의 모습은 본인 말마따나 자신감의 회복이었다. 이는 6회말 ‘천적’ 저메인 다이에게 통한의 2점 역전홈런을 허용한 뒤 피칭에서 단적으로 확인됐다. 기껏 호투하다가도 한번 삐끗하면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지곤 했던 예전의 모습은 간데없이 그는 언제 홈런을 맞았냐는 듯 후속타자 에루비엘 두라조를 삼진으로 솎아내며 한숨을 돌렸다.
이어 스캇 해티버그의 평범한 1-2루간 땅볼을 2루수 알폰소 소리아노가 잡았다 놓치며 타자주자를 1루에 내보냈을 때도 전혀 동요 하지 않고 다음타자 바비 크로스비를 우익수 플라이로 처리, 불길이 더 이상 번지는 것을 막아냈다. (LA 다저스가 파죽의 9연승으로 플레이오프 고지를 향해 쾌속진군하던 2001년 8월 말 박찬호는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의 원정경기에서 1루수앞 불규칙 바운드안타로 타자주자 페르난도 비냐가 살아나가자 대선배 1루수 에릭 캐로스에게 불같이 화를 내고 게임을 그르치는 등 야수들의 일거수일투족에 지나치게 민감한 반응을 보여 평정도 잃고 승리도 잃어버린 경우가 많았다.)
자신감의 회복과 함께 여유도 되찾았다. 1회말 2사후 에릭 차베스에게 중전안타를 얻어맞은 뒤 곧바로 다이를 3구삼진으로 돌려세운 것이나, 3회말 1사 주자 1루에서 바비 킬티의 평범한 내야플라이를 처리할 때 우선 포구에 급급하기보다 낙하지점을 잘못 잡은 것처럼 실수를 빙자(?)해 볼을 떨어뜨린 뒤 병살을 노린 것도 어딘지 급하고 왠지 불안한 구석을 떨치지 못했던 ‘그 옛날 박찬호’를 잊게 하는 장면이었다.
박찬호의 달라진 모습이 심리적인 것만은 물론 아니다. 피칭의 내용이 몰라보게 좋아졌다. 그렇다고 본국 언론들이 호들갑을 떤 것처럼 광속구가 불을 뿜은 것은 아니다. 그가 이날 던진 공 가운데 가장 빠른 것은 5회말 스쿠타로를 3구삼진 처리할 때의 세 번째 공으로 94마일이었다. 95-96마일대 공을 수시로 뿌리던 다저스 시절에 비하면 아직도 제 속도를 회복했다고 볼 수는 없다. 진짜 눈에 띄게 달라진 것은 제구력이다. 특히 새로 익힌 투심 패스트볼의 위력은 놀라웠다. 직구처럼 날아가다 홈 플레이트에 거의 다가가 꼬리를 치는 것처럼 흔들린다고 해서 ‘테일링(tailing) 패스트볼’로 불리는 이 공이 기막히게 먹혔다.
덕분에 왼손타자에게 약하다는 박찬호의 고질병은 거의 고개를 내밀지 못했다. 에루비엘 두라조 등 왼손타자들이 마치 몸을 맞힐 듯 날아오는 공에 움찔해 엉덩이를 빼거나 움츠리면 돌연 공 끝이 흔들리며 스트라익 존으로 빨려드는 바람에 삼진아웃을 당하기 일쑤였다. 테일링 패스트볼이 먹혀들자 박찬호는 이따금 포심패스트볼을 시험삼아 던져봤을 뿐 변화구와 스플리터를 거의 던지지 않고도 맘 편하게 타자들을 요리할 수 있었다.
이날 경기의 유일한 아쉬움은 6회말 동점 허용뒤 1사1루에서 다이와의 승부였다. 다이는 비록 그때까지 박찬호를 공략하지 못했지만 역대 전적 12타수3안타에 3안타 모두 홈런인 박찬호의 천적이었다. 게다가 지난해 부진으로 방출위기에 몰렸다 간신히 살아난 다이는 전날 개막전에서도 맹타를 휘두르는 등 일찌감치 타격에 물이 오른 상태. 다이 뒤에는 한방을 노리며 유난히 스윙이 큰데다 테일링 패스트볼에 약한 두라조. 버스 떠난 뒤 객적은 소리이긴 하지만, 그렇다면 박찬호는 다이를 걸러도 좋다는 생각으로 외곽을 쑤시는 피칭을 했어야 하지 않을까.
물론 박찬호도 다이를 의식했던 것 같다. 초구 2구 모두 홈 플레이트를 스칠 듯 낮게 깔렸다. 그런데 불리한 볼카운트를 일단 유리하게 바꿔보자는 생각이 앞섰는지 아니면 그래 칠테면 쳐보라는 생각이었는지 알 수 없으나 박찬호는 이날 오른손 타자들에게 거의 써먹지 않던 몸쪽 높은 공(라이징 패스트볼)을 던졌다. 속도마저 92마일로 치기 딱 좋은 것이었다. 산전수전 다 겪은 다이는 볼카운트 조절용으로 좋은 공이 들어오리라 예상하고 볼것없이 방망이를 휘둘러 승부를 결정지었다. 딱 하나 실투였지만 너무 오래 기다리고 너무 의미가 큰 승리를 앗아가버린 안타까운 실투였다.
<정태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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