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영모 <언론인>
한국 시계는 지금 과거를 향해 거꾸로 돌고 있다. 한 두 해 뒤로 가는 게 아니다. 돌려도 한참을 돌려대고 있다. 꽃망울 살포시 열리는 한국의 4월은 찬바람이 윙윙 몰아치는 한 겨울이다. 살을 에는 정치바람이 전국을 강타하고 있는 탓이다. 법 지키고 점잖 떨다가는 제 것도 못 지키는 게 한국 사회라지만 내 편과 네 편을 갈라 놓고 벌이는 투쟁은 죽기 아니면 살기다.
남을 매도하고 밀어내고 상대방 이마에 ‘수구반동’을 붙여주는 자들일수록 말은 청산유수요, 정치 쇼의 귀재들이라 많은 이들이 홀딱 넘어간다. 그들은 민중의 심리를 자기편으로 이끄는 심리전에 도가 튼 데다 인터넷이라는 21세기 첨단무기로 무장해 군중 선동 재주도 대단하다.
넓게 보면 노무현 대통령을 그런 카테고리에 분류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가 말이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구변의 달인이라는 사실은 잘 알려진 일이다. 그의 표정 또한 자유자재 아닌가. 어느 계제에 분노하고, 눈물짓고, 어수룩해 보이고, 진지해져야 하는지를 가장 잘 포착하는 ‘미디어 정치인’으로 정평 나 있다.
그에 버금가는 정치인을 대라면 단연 정동영이라는 젊고 패기만만하고 언변 좋고 게다가 ‘얼짱’인 그를 지목하지 않을 수 없다. 전북 태생이라 김대중씨가 발탁해 정계에 내보낸 ‘호남의 차기 주자’다. 현직은 노무현씨를 정점으로 한 ‘열린우리당 의장’, 곧 집권여당 당수다. 올해 쉰 한 살이니까 한국 동란 휴전 무렵에 태어난 전후세대다.
한데 이들 두 사람, 정확히 말해서말 잘해 벼락 출세한 장본인들이, 그 말재주 때문에 깊은 수렁에서 허우적대고 있음은 흥미로운 일이다. ‘말로써 말 많으니 말 많을까 하노라’라는 옛 시조에 딱 맞는 사람들이다.
노무현씨의 수많은 말들, 그 임기응변적 화려한 수사와 현란한 말 바꾸기 재주가 몰아온 오늘의 불행은, 대통령 탄핵이라는 헌정사 초유의 기막힌 일로 귀결됐다. 헌법재판소가 ‘국회 탄핵발의’에 손을 들어주면 짐을 싸서 청와대를 나와야 하는 최악의 경우도 감내하지 않으면 안될 형편에 몰렸다.
말재주에서 둘째가라면 화를 낼 정동영씨도 입 한번 잘못 놀렸다가 화근을 자초했다. 한국의 나이든 이들에게 골방에나 들어앉아 있으라는 투로 한 ‘문제 발언’은 이렇다. “최근에 변화가 왔고, 촛불 집회의 중심에 젊은이들이 있다. 미래는 20대, 30대들의 무대다. 그런 의미에서 한 걸음만 더 나아가서 생각해 보면 60대 이상 70대는 투표 안 해도 괜찮다. 꼭 그분들이 미래를 결정해 놓을 필요는 없다. 그분들은 어쩌면 이제 무대에서 퇴장하실 분들이니까--그분들은 집에서 쉬셔도 된다.”
이 정도면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입 한번 잘못 놀렸군” 하는데 동의할 것이다. 건국과 6.25동란과 경제발전에 나름대로 몸을 바친 그들이지만 세월을 어찌하랴 하고 이미 퇴진한 처지들이다. 한데 헌법이 보장한 평등 보통선거에서 ‘귀중한 한 표’의 행사를 기다리고 있는 그들을 향해 ‘당신들은 이제 늙었으니 투표고 뭐고 할 것 없이 집에서 푹 쉬시오’하고 등을 밀어 냈으니, ‘늙는 것도 서러운 판에 이런 발칙할 데가 있느냐’, 어허, 현대판 고려장이 따로 없군”하고 분노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내가 글머리에서 ‘거꾸로 가는 한국의 시계’라고 했을 때, 째지게 가난한 아들이 고령의 부모를 지게에 지고 산 속 깊이 고려장을 지냈다는 그 수백년 전의 고사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은 아니다. 나는 노무현씨가 20대 30대가 주축인 ‘노사모’를 향해 “혁명은 끝나지 않았다”고 독려하고, 정동영씨가 ‘60대 70대 이상 노인들은 집에서 쉬라’고 한 말이, 40여년 전 중국 ‘문화혁명’ 당시의 상황과 어쩌면 이리도 같을까 불현듯 연상을 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연상은 놀라운 충격으로 나의 뇌리를 쳤다.
그 당시 중국의 통치자 마우저뚱은 ‘대장정’ 때 생사고락을 같이 한 60대 이상의 당 원로들을 소탕하기 위해 철부지 10대와 농부, 도시 근로자들을 모아 ‘문화혁명 전위대’를 조직해 정부 내 고위관료, 대학교수, 사회 지도층을 길거리로 끌고 나와 인민재판으로 처형하거나 시골로 내쫓았다. 중국의 암흑기는 20년 넘게 계속됐다.
이번 4.15 총선거에서 노무현 지지 세력이 국회를 장악하고, 헌법재판소가 노씨 손을 들어주는 사태가 동시에 일어난다면 한국 사회는 어찌될까. 중국의 문화혁명에 버금가는 세대갈등과 대립, 그리고 ‘노인 수난시대’가 도래하는 건 아닐까. 중국식 문화혁명은 아니더라도 ‘노사모’로 상징되는 패거리 정치 문화가 한국을 강타할 것만은 분명하다.
후대 역사가가 ‘21세기 한국판 문화혁명’이라고 기술할 일이 실제로 일어날지, 총선 향배가 주목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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