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가쟁명(百家爭鳴)이라고 하면 지나치고, 뭐라고 하면 좋을까. 여하튼 지겨울 정도로 쏟아지고 있는 게 이라크 전쟁을 둘러싼 논쟁이다.
석유를 노린 미 제국주의의 침공에 다름 아니다. 아니, 전 세계 민주화의 대장정이다. 이라크 전쟁 1주년을 맞아 관점은 여전히 양분돼 있다.
또 다른 관점이 있다. 여성해방전쟁이라는 시각이다. 이 주장에 따르면 여성해방 혁명은 어쩌면 아직 시작에 불과한 건지도 모른다. 상당히 타당성이 있다. 북미와 서구 등 일부 지역을 제외할 때 지구라는 행성은 아직도 여권불모지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얼굴을 가린 베일이 조금만 찢어져도 매를 맞는다.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진료가 거부돼 생명을 잃는다. 직업을 가질 수 없는 건 물론이다. 탈레반 정권하의 아프가니스탄 상황이었다.
‘명예살인’이 권장된다. 강간범죄의 억울한 피해자인 건 안다. 그러나 집안의 수치다. 그러므로 자살을 강요한다. 말을 안 듣는다. 가족들이 직접 살해한다. 그래서 ‘명예살인’이다.
미군이 진주한 바그다드에서 버젓이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다. 아직도 여자 혼자는 돌아다닐 수 없다. 이라크는 해방됐지만 여성의 인권은 해방되지 않았다는 말이다.
베일을 한 여성. 그건 반(反)미, 반(反)서방 투쟁에서 승리의 상징이다. 그러므로 어떤 대가를 치러도 이를 지켜야 한다. 아랍 이슬람권의 정서다.
태 안의 아이가 여아면 지운다. 버려지는 여아가 하나 둘이 아니다. 가난한 집 딸이 팔려 가는 것쯤은 예사다. 인도에서, 중국에서, 동남아시아에서 아무 거리낌없이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다.
민주주의가 실패한 곳, 빈곤과 무지가 지배하는 곳. 그곳에서 여성은 여전히 압제의 대상이다. 여권신장은 민주화와 정비례한다.
그런데 한가지 역설의 현상이 발견된다. 아시아권은 전반적으로 여권불모지역이다. 정상에 오른 여성정치 지도자가 그런데 유독 많다. 인디라 간디. 베나지르 부토. 메가와티. 쿠마라퉁가. 아웅산 수지…. 대충 꼽아도 10명이 넘는다. 무엇이 이들을 정상에 오르게 했나.
아버지의 후광이다. 화려했던, 혹은 불행한 정치인 가족사를 배경으로 국민들의 동정을 쉽게 얻은 탓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간디는 인도 독립의 아버지 네루의 딸이다. 베나지르는 쿠데타에 희생된 부토 파키스탄 총리의 딸이고. 미얀마의 아웅산 수지도 그렇다. 메가와티 인도네시아 대통령도 스카루노의 딸이다.
일종의 변형된 권력세습이다. 권력을 핏줄이, 가문이 잇는다는 개념이 통용되는 사회에서나 가능한 권력의 대물림으로 여권신장과는 관계가 없다.
여성정치인 시대가 열리고 있다. 한국 이야기다. 여당 대변인이 여성이다. 두 야당의 대변인도 여성이다. 원내 2당의 2인자도 여성이다. 그리고 마침내 원내 제 1당 대표로 여성 정치인이 선출됐다. 박근혜다. 박정희 대통령의 딸이다.
어떻게 보아야 하나. 획기적인 민주주의의 발전이다.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 여권신장의 단면으로 볼 수도 있고. 해석은 자유다. 정치에 관한 한 역시 백가쟁명의 시대를 맞은 게 한국이니 하는 말이다.
그러면서도 뭔가가 자꾸 걸리는 느낌이다. 여성 정치인이니까. 아니다. 그게 뭘까. 정치인 박근혜 보다는 ‘박정희의 딸 근혜’의 모습이 자꾸 어른거려서인가. 그렇다. 뭔가 잡히는 것 같다.
월드컵, 붉은 악마, 반(反)미와 촛불시위. 2000년대 젊은이들을 하나로 묶는 키워드들이다. 이들은 디지털 세대다. 동시에 ‘몸짱’ ‘얼짱’의 세대다. 이전 세대와는 전혀 다르다. 그래서 신인류(新人類)라고 했던가.
이 신인류는 과거의 정치에 식상해 있다. 이벤트를 할 줄 모르는 데다가 부패까지 했다. 그러니 맞지 않는다. 이들에게 어필할 새 상품, 새 이미지가 필요하다. 뭘까.
‘몸짱’ ‘얼짱’이 그 힌트다. 내용은 나중 문제다. 눈을 확 끌 치어 리더를 세워야 한다. 이게 ‘얼짱’시대, ‘몸짱’시대의 정치 모토다. 여성 정치인의 갑작스러운 부상, 박근혜 대표 등장으로 절정을 이룬 이 현상의 배경은 바로 이게 아닐까.
한 가지가 더 있다. 박정희 신드롬이다. 따질 것 없다. 좌우지간 먹고살게 했으니 찬양을 받아 마땅하지 않으냐는 거다. 문민시대 십수년, 민주화 허무주의가 가져온 현상이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한국정치가 갑자기 지겨워진다. 그리고 아주 오랜 화두가 새삼 떠올려진다. ‘박정희는 우상’인가 ‘망령’인가 하는 것이다. 뭐라고, 우상이라고. 하기야 판단은 자유다. 백가쟁명시대니까.
옥 세 철<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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