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전 테러 재발할 가능성 높아
마드리드 폭파 사건 테러리스트 재기 기회줘
총선 앞둔 한국도 무풍지대라 볼수 없어
정치 지도자들 불명예와 전쟁중 택일해야
이라크 전쟁 1주년을 맞아 테러가 다시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다. 총선을 앞두고 마드리드에서 터진 폭탄은 200여명의 목숨을 앗아갔을 뿐 아니라 이라크 전을 지지해 온 정권을 무너뜨렸다는 점에서 9·11 사태 후 테러리스트들에게 최대의 승리를 안겨줬다. 2년이 넘게 계속되고 있는 ‘테러와의 전쟁’이 어떻게 되어가고 있으며 역시 선거를 앞두고 있는 한국은 무풍지대인지 점검해 본다.
후세 사가들의 부시 대통령에 대한 평가를 좌우할 테러와의 전쟁은 겉보기에는 일단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북한, 이란과 함께 최대 테러 지원국이던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은 미군의 포로가 되어 있고 9·11 사태를 일으킨 알 카에다 지도부의 2/3는 사살되거나 생포된 상태다. 한 때 테러리스트의 대표격이던 리비아의 가다피는 테러와 대량 살상 무기 개발 포기를 선언했다. 알 카에다의 ‘머리’인 오사마 빈 라덴과 알 자와히리의 체포도 멀지 않은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그러나 이들이 잡힌다 해도 그것만으로 테러가 종식되리라고 믿는 것은 속단이다. 알 카에다는 원래부터 중앙 집권 체제가 아니라 지방 분권형 조직이다. 수뇌부에 대한 미국의 공격이 집요해지자 이런 경향은 더욱 강해져 이제는 지역별로 명목상 알 카에다 이름을 건 자생 조직이 생겨나고 있다. 이번에 마드리드 테러를 저지른 조직도 모로코의 알 카에다 유관 단체로 오사마가 직접 테러를 지시한 것은 아니라는 분석이다.
누가 테러를 지시했건 이번 마드리드 사건을 계기로 그동안 수세에 몰려 있던 테러리스트들은 재기의 모멘텀을 얻게 됐다. 불과 10개의 폭탄으로 반 테러 연합 전선에 흠집을 낼 수 있다는 것이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알 카에다의 과거 테러는 실패의 연속이었다. 이슬라마바드 이집트 영사관을 폭파했다 오사마는 수단에서 축출됐으며 예멘에서 미군 함정을 공격했다 예멘에서도 설 땅을 잃었다. 9·11 테러를 했다 본거지인 아프가니스탄에서 쫓겨났으며 한때 보호자였던 파키스탄도 적으로 돌렸다. 이번 스페인 테러는 보기 드문 승리의 하나다.
애초부터 대다수가 이라크 전 참전을 반대하던 스페인 국민들은 이번 사건이 나자 테러리스트보다 여론을 무시하고 참전을 강행한 정부에 원망의 화살을 돌렸다. 유럽 언론에서는 부시의 가장 강력한 지지자인 토니 블레어가 있는 영국에서 폭탄이 터지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기사가 나오고 있다.
미국 주도로 이뤄진 이라크 전은 테러와의 전쟁을 돕기보다는 회교도들의 반발을 불러 테러 단체에 자원하는 ‘순교자’ 수만 늘려 줬다는 것이 많은 유럽인들의 생각이다. 이런 상태에서 계속 테러가 터질 경우 이라크 주둔을 고집할 유럽 정부는 거의 없다고 봐도 된다. 마드리드 테러가 터지자 스페인과 함께 친미 노선을 걷고 있는 ‘신 유럽’의 대표 주자 폴란드도 “이라크 전쟁에 잘못 말려들어 갔다”며 “예정보다 일찍 철군하겠다”고 꼬리를 내리고 있다. 유럽 각국이 전전긍긍하며 제발 자기 나라에서 테러가 터지지 않기만 비는 꼴이다.
이라크 전쟁 1주년을 맞아 해외에서는 이라크 전에 대한 비판이 계속되고 있지만 실제 이라크 인들의 생각은 좀 다르다. 옥스퍼드 연구소가 최근 조사한 바에 따르면 1년 전보다 살기가 더 좋아졌다고 생각하는 이라크 인은 56%로 나빠졌다고 생각하는 19%보다 훨씬 많았다. 1년 후의 전망을 묻는 질문에서는 71%가 ‘좋아질 것’이라고 응답, ‘나빠질 것’이라는 7%를 압도했다. 미국에 의해 사담이 축출된 것이 모욕이라고 답한 사람은 해방이라고 답한 사람과 같은 41%였다. 그러나 주둔군이 즉시 떠나야 한다고 응답한 사람은 15%에 불과했으며 54%는 치안이 확립될 때까지 또는 이라크 정부가 들어설 때까지 남아 있어야 한다고 답했다.
이라크 철군은 이라크 침공이 정당화될 수 있느냐와는 별개 문제다. 현 상황에서 일시에 외국 군대가 빠져나간다면 이라크는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질 것이며 그야말로 새로운 테러리스트의 온상이 될 것이다. 이를 성사시키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미국을 외교적으로 고립시키는 것이며 그러려면 반전 여론이 높은 나라의 선거 전 테러를 감행해야 한다는 것을 테러 단체들은 알게 됐다.
이런 와중에서 테러 문제 전문가인 스티브 콜 워싱턴포스트 편집국장의 “알 카에다가 이라크 파병을 약속한 한국을 공격 대상으로 삼을 수도 있다”는 경고는 주목할 만한 발언이다. 한국은 이라크에 군대를 보내기는 했지만 이는 여당보다는 야당의 지지를 얻어 가까스로 이뤄졌다. 지금 한국의 야당은 탄핵 사태 후 지리멸렬된 상태다.
이런 상황에서 서울 지하철에서 마드리드 같은 사태가 벌어진다면 그 파장은 어마어마할 것이다. 흥분한 한국민들은 테러를 저지른 알 카에다보다는 이라크 파병에 찬 표를 던진 국회의원과 파병 압력을 넣은 미국에 증오의 화살을 돌릴 것이다. 이라크 파병에 반대하는 촛불 시위가 1년 내내 열릴 것이고 정부는 이에 굴복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한미 관계는 회복하기 힘든 상처를 입을 것이고 한 동안 잠잠해졌던 주한 미군 철수 여론이 다시 비등할지 모른다.
북한이 핵 기술의 대부분을 파키스탄에서 전수 받은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파키스탄은 한때 알 카에다의 본산이기도 했다. 똑같이 미국을 증오하는 두 집단이 총선 전 테러에 관한 모의를 했다 해도 놀랄 일은 아니다.
냉전이 한창이던 시절 미국과 소련은 서로 프락치를 통한 전쟁은 했어도 상대방 국민을 겨냥한 테러는 하지 않았다. 속마음은 어떻든 소련은 “미국 정부는 적이지만 미국 국민은 벗”이란 공식 입장을 견지했다. 그러나 알 카에다는 다르다. 미국 정부고 국민이고 모두 적이기 때문에 무고한 민간인을 대량 살상하는데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새로 들어선 스페인 정부는 이라크 철군을 통해 테러리스트를 무마해 보려고 하지만 그 뜻이 이뤄질지는 의문이다. 알 카에다를 비롯한 극렬 집단은 1492년 스페인이 그라나다를 함락시킨 후 회교도를 이베리아 반도에서 축출한 것을 기억하며 스페인 전역을 ‘미 수복지구’로 보고 있다. 때가 되면 여기서 기독교도들을 내몰고 옛 영화를 재현하겠다는 것이다. 유화 제스처로는 문제의 해결점을 찾을 수 없다.
9·11 테러 이후 2년 6개월 째 접어든 ‘테러와의 전쟁’은 중대한 국면을 맞고 있다. 스페인 국민들과 새 정부는 테러리스트의 협박에 굴복함으로써 선거 전 테러의 재발을 사실상 보장했다. 다음 번 테러 세례를 받게 될 나라가 스페인의 전철을 따른다면 ‘테러 도미노’ 현상과 함께 ‘테러와의 전쟁’은 난관에 봉착할 것이다.
테러리스트와 깡패의 공통점은 한번 굴복한다고 요구 사항이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히틀러의 백지 수표에 사인을 하고 돌아온 체임벌린에게 처칠이 들려준 “당신은 불명예와 전쟁 중 하나를 택할 수 있었으나 불명예를 택하는 바람에 전쟁까지 하게 됐다”는 꾸짖음을 모든 나라의 지도자들이 다시 음미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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