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숙<수필가>
나이 탓인가. 노여사는 집에 도착하자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여행이라야 겨우 4박 5일, 그것도 일본 북해도 시누이 집에서 온천만 왔다 갔다 했을 뿐인데도 제법 피곤했다.
집안은 닷새 전 이른 비행기 시간에 맞춰나가느라 어수선하게 늘어놓은 그대로였다. 노여사가 현관에서 흩어진 신발을 대충 정리하는 동안 그녀의 남편은 거실이며 안방 심지어 부엌까지 서둘러 불을 켰다.
아서요, 부엌 불만 남기고 다 꺼봐요.
왜 그래? 답답하게. 의아해하는 남편에게 노여사는 거듭 손사래를 쳤다.
오늘은 그냥 이렇게 쉽시다. 우리 아파트 불켜진 것 보면 지현이네 또 쪼르르 건너올 것 아니에요. 내가 도착 날짜를 확실하게 말 안 해서 걔네는 우리가 내일쯤이나 올 걸로 알 거라구요.
건너오면 좋지 뭘 그래. 안 그래도 현욱이란 놈이 눈에 삼삼하구만. 선물도 빨리 건네주고...
물론 노여사도 어린 손자가 보고싶지 않은 건 아니었다. 매일 오후 퇴근하는 제 어미 편에 딸려보낼 때는 시원하다가도 막상 돌아서면 금새 다시 보고싶은 게 손자였다. 일본에서도 줄곧 그 녀석 걱정만 했다. 그 애 친할머니가 멋만 부릴 줄 알지 찬찬히 손자를 거두는 사람이 아니라 더 그랬다.
그렇기는 해도 노여사는 적어도 오늘만큼은 그들의 방문이 달갑지 않았다. 물론 몸이 피곤한 탓도 있지만 새삼 딸인 지현을 향해 서운한 감정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오늘쯤은 지가 퇴근길에 잠시 들러 미리 청소라도 해놓아야 하는 거 아닌가 말이다.
뭐 친정엄마는 사람도 아닌가? 언제까지 일방적으로 베풀어야만 하나. 딸자식 남보다 공부 더 시켜 바리바리 싸서 시집보냈으면 됐지 이건 챙겨줘야 할 게 끝도 없었다.
지현은 임신을 하고는 아예 친정 옆단지로 이사를 와 산후조리와 육아를 노여사에게 슬그머니 떠맡겼다. 덕분에 노여사는 몇 년 동안 외출 한 번 편하게 못하고 살았다. 밤이면 여기저기가 쑤셨지만 그래도 딸 회사에 전화해 이지현 차장 좀 바꿔달라고 할 때면 이런 고생쯤 딸의 당당한 사회생활을 위해 못할 것도 없다는 생각을 했다.
한편 비록 친정엄마의 도움을 받는다고는 해도 지현 또한 가정과 직장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게 그리 녹록치는 않았다. 아침부터 한바탕 전쟁을 치르고 출근을 하면 자신이 도대체 왜 이러고 사는지 문득문득 회의가 들었다. 어찌 보면 직장에 있는 시간이 차라리 휴식이었다. 퇴근하기가 무섭게 친정에 들러 아이를 픽업하고 나면 늦은 밤 잠자리에 들 때까지 그야말로 다리 한 번 쭉 뻗고 쉴 틈이 없었다.
그래도 점심시간에 맞벌이하는 친구들과 만나 서로 고충을 나누면 조금은 위로가 됐다. 정도의 차이가 있기는 해도 직장일과 가사노동의 이중고에 시달리는 모습은 모두가 닮은꼴이니까. 안타깝게도 개중엔 힘든 육아부담과 무심한 남편 때문에 이미 부부갈등의 골이 깊어진 친구들도 있었다. 그들에 비하면 지현은 행운인 셈이다. 헌신적인 친정엄마 덕분에 종종 아이를 떼어놓고 신혼 때처럼 부부만의 오붓한 시간을 즐길 수 있으니까.
이번에 지현은 처음으로 아이를 시어머니께 맡겼다. 얼만 전 친정부모님이 아주 어렵게 당신들의 여행계획을 밝히셨을 때 지현은 내심 당혹스러웠다. 하지만 드러내놓고 심란한 내색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분들로서는 현욱이 태어나고 처음 하시는 해외 나들이였으므로.
사실 지현의 시어머니는 소위 신식할머니에 속했다. 얼마나 정성 들여 자신을 가꾸는지 피부가 며느리인 지현보다 더 고왔다. 그분은 거의 매일 친구들과 어울려 맛있는 음식점 찾아다니고 가요교실에 나가 꾀꼬리처럼 노래부르시는 게 주된 일과였다. 그렇기는 해도 지금처럼 다급할 때 아이를 봐주시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감사한가.
그러나 솔직히 친정엄마 손에 맡겼을 때에 비하면 아이 꼴은 영 말이 아니었다. 퇴근길에 꼬질꼬질한 현욱을 데려오자면 새삼 친정엄마 생각이 간절했다. 노여사는 힘에 부쳐하면서도 딸이 힘들세라 퇴근 무렵이면 아예 아이 목욕까지 시켜놓고 지현을 기다렸다.
제 아빠는 어려서 얌전했는데 얘는 누굴 닮아 이리 부산하니? 온 전신 뼈마디가 다 쑤신다, 얘. 오늘 퇴근길에 남편과 함께 시댁에 들른 지현을 보자 시어머니는 대뜸 볼멘소리를 하셨다. ‘며칠이나 봐주셨다고 저러시나. 꼬박 2년이 넘도록 애쓴 사람도 있는데...’ 순간 지현의 속에서 뭔가 묵직한 게 치밀어 올랐다.
그래도 이참에 너희가 준 용돈은 고맙게 잘 쓰마. 시어머니의 얼굴에 환하게 생기가 도는 순간 남편의 얼굴은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함께 집에 돌아오는 동안 지현은 남편과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생각해보니 남편은 이제껏 제 자식 맡아 키워준 장모님께 감사표시 한 번 제대로 한 적이 없었다. 며칠 애 봐준 자기 엄마한테는 아내 몰래 용돈까지 챙겨드리면서... 그러나 남편에 대한 분노보다는 당신 몸이 부서져라 헌신하고도 딸과 사위에게 변변한 대접조차 못 받는 친정엄마 때문에 지현은 새삼 속이 아팠다.
사실 노여사는 지금껏 애 봐준 대가로 딸이 주는 사례금을 단 한 차례도 받지 않았다. 젊어서 빨리 자리 잡으라고 번번이 거절하시는 바람에 지현은 겨우 생신이나 명절에 용돈을 조금 드렸을 뿐이다. 물론 처음 얼마간은 불편했지만 어느덧 자신도 모르게 그분의 희생에 익숙해졌다.
현욱이 데리고 먼저 집에 가있어. 나 엄마집 청소 좀 하고 갈게.
남편의 차가 보이지 않자 지현은 불이 환하게 밝혀진 근처 상가 건물로 뛰어들어갔다.
아저씨, 갈비 제일 상품으로 넉넉히 손질 좀 해주세요! 지현은 싱싱한 장미 한 다발을 고르며 정육점 아저씨에게 큰소리로 주문을 했다.
여보, 제 자식 키워보더니 지현이도 이제야 철이 드나봐요.
꽃이 놓여진 식탁에서 자신이 끓여놓은 갈비탕을 훌훌 맛나게 드실 부모님을 떠올리자 지현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총총 걸음을 옮길 때마다 양손에 들려진 장미와 파인애플에서 향긋한 향기가 솔솔 풍겨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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