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대장들의 세계에도 룰은 있었다. 코피가 나면 무조건 지는 거다. 불문율이지만 이 룰은 충실히 지켜졌다. 한 아이가 싸움을 벌였다. 이유는 기억이 안 난다. 그래 봐야 유치한 말싸움에서 시작됐겠지.
그 싸움이 그런데 별났다. 그 아이의 코피가 터졌다. 승부는 끝난 것 아닌가.
그게 아니었다. 얼굴에, 몸에 코피를 척척 바르더니 ‘나 죽여라’하며 마구 매달린다. 그리고는 무슨 소린지 모를 넋두리다. 괴상하게 됐다. 도무지 없던 일이었다. 불문율은 무너졌다.
노무현 대통령이 탄핵됐다. TV에 비쳐진 모습이 비장하다. 심각한 일이다. 아니, 심각해야 할 순간이다. 그런데 떠오르는 건 엉뚱하게도 먼 옛날 어릴 때의 일이다. 그 아이, 코피를 질질 흘리며 넋두리를 하던 그 아이의 얼굴이 오버랩되면서.
그리고 벌써 한 주다. 한가지 생각이 내내 맴돈다. 인품(character)의 문제인가, 이데올로기의 문제인가 하는 것이다.
한국 내 문제다. 탄핵사태에 대한 논평을 요구받자 고이즈미 일본총리가 말을 비켰다고 한다. 미국 정부도 말을 피하기는 마찬가지다. 뭐라고 했더라. 사태추이를 지켜보겠다고만 했던가. 공식 논평을 극력 자제하는 표정이다. 하기야 뭐라고 말하겠는가.
이상하리 만치 논평이 나오지 않는다. 신문도 해설 정도다. 그 흔한 사설도 보기 힘들다. 전혀 관심이 없나. 아닌 것 같다. 관망하는 것 같지만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표정이 역력하다.
그 관심의 일단이 타임지 기사다. 경제가 위태롭다. 북한의 핵 위협이 고조되고 있다. 6자 회담 도 불투명하다. 이런 정황에서 탄핵사태다. 위기에 리더십 공백상황을 맞고 있다는 지적이다.
한국의 국제적 위상도 운위된다. 책임감 있는 국제 사회의 일원의 모습은 간데 없고 자기 통제력이 없는 사춘기 청소년으로 비쳐지고 있다는 것이다.
비슷한 이야기들이 계속된다. 여전히 논평은 극히 자제하는 분위기에서. 왜 이런 현상인가. 캐릭터의 문제인지, 이데올로기의 문제인지 판단이 안 가서인가.
이야기의 가닥은 그렇지만 잡혀가고 있다. 탄핵사태는 외피만 보면 대통령의 캐릭터의 문제 같다. 그러나 안을 들여다보면 이데올로기의 문제라는 쪽으로.
크리스찬 사이언스 모니터지의 논평이 그렇다. 탄핵문제로 한국의 여·야가 육탄전에 돌입할 즈음 이 신문은 다소 엉뚱해 보이는 기사를 실었다. 한국과 미국의 정보 공조체제가 삐걱거린다는 내용이다. 북한을 보는 시각 차가 점차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탄핵사태에 대한 논평이 나왔다. 요지는 한국의 탄핵정국 추이에 따라 앞으로 수주 내에 미국의 북한 핵 정책은 결정적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탄핵의 역풍은 4.15 총선에서 여당의 승리를 가져올 수 있고, 이 후 미국과 한국의 관계는 한층 거세질 한국 내 반미감정을 타고 더 소원해질 수 있다는 전망이다. 한국은 총선 이후 더 반미에, 민족주의적 방향으로 경도될 것으로 본 것이다.
월 스트릿 저널도 비슷한 시각이다. 노 대통령이 탄핵을 자초한 데에는 뭔가 책략의 냄새가 난다는 투다. 대통령이 전체 국가 이익보다 당파의 이해를 더 중요시해서는 안 된다는 충고다.
그리고 촛불시위가 대규모 폭력사태로 변질돼 사회불안으로 이어질 수도 있어 ‘3.12 사태’에 뒤이은 ‘4.15 총선’은 한국 민주주의의 ‘리트머스 테스트’가 될 수 있다는 경고다.
누가 말했더라. 한국은 현재 5.18 시대의 연장선상에 있고. 5.18은 군사독재에 대한 연합 이데올로기의 저항운동이라고.
자유주의자, 사회주의자, 민족주의자로 구성된 그 연합은 와해되면서 심한 불균형의 구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사회주의자 세력이 어느 순간 민족주의자로 옷을 갈아입은 탓이다. 그리고 그 불균형의 구도는 올해로 17년째 이어져 왔다.
빛은 모아지면 흰색으로 보인다. 프리즘을 통과시키면 그렇지만 여러 색이 나타난다. ‘3.12 사태’ 그리고 ‘4.15 총선’은 일종의 프리즘이다. 한국 내 각 정파의 색깔을 확실히 구분 지을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이를 한국 민주주의의 리트머스 테스트라고 미 언론은 지적한 게 아닐까.
탄핵사태에 왜 말을 아끼고 있을까. 그리고 보니 어느 정도 알 것도 같다. 사태를 그만큼 심각하게 본다는 의미다. 까딱하다간 미국의 핵 관련 세계전략구도에 상당한 차질이 올 수도 있으니까.
그나저나 노 대통령은 요즘 어떤 심정일까. 서울의 밤거리를 수놓은 촛불행렬을 바라보며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을까. 아니면.
옥 세 철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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