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오래 전이지만 한 때 한국에서 ‘갑부 열전’이란 드라마가 인기를 끌었던 적이 있다. 한국 갑부의 일생을 TV 드라마 식으로 보여준 이 프로 가운 ‘공주 갑부 김갑순’의 이야기 중 나온 “민나 도로보데스”(모두가 도둑놈)란 말은 한동안 장안의 유행어가 됐었다. 그 때나 지금이나 한국 정치인 하는 짓이 비슷해서였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은 “비속한 일본어를 극에서 남발할 수 있느냐”는 일부 식자층의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인간, 특히 집권자는 모두 잠재적 도둑이라는 생각은 한국 TV 작가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이를 체계적으로 자신들이 고안한 정치 문서에 반영한 사람들도 있다. 바로 미국 연방 헌법 입안자들이 그들이다.
헌법 초안 작성에 주도적 역할을 한 제임스 매디슨은 자신의 정치 철학과 헌법 이론을 설파한 ‘페더럴리스트 페이퍼’에서 헌법의 가장 큰 임무로 사회 질서를 유지할 집권자를 선출하는 것과 함께 이 집권자가 권력을 남용하지 않도록 감시하는 것을 들었다. 그는 그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야심이 야심을 견제하도록 하는 것”으로 보고 숱한 권력의 분립을 통해 누구도 한 손에 권력이라는 칼을 움켜쥐지 못하게 했다.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정치인은 모두 겉으로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 일하겠다고 떠들지만 실제로는 권력을 잡거나 잡은 권력을 놓지 않는 것이 최우선 과제다. 권력을 잃을 경우 자신의 뜻을 펴지 못하는 것은 물론 자신의 정치 생명마저 위협받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권력을 잡기 위해서는 유권자의 마음을 움직여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이들의 환심을 살만한 말 이외에는 해서는 안 된다. 요즘 같이 경제가 가장 큰 관심사인 때는 자신이 경제를 살리는데 최적임자라는 점을 강조할 수밖에는 없다.
지난 번 한국 대선 때 노무현 대통령은 자신이 집권하면 한국의 국민 소득을 현 1만 달러에서 2만 달러로 올려놓겠다고 공언했다. 그러나 미국 대통령 후보 가운데 그런 약속을 하는 사람은 없다. 그랬다가는 유세 기간 내내 코미디언들의 조롱거리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미 국민들은 어떤 대통령도 모든 국민의 수입을 2배로 올려줄 수는 없음을 알고 있다.
미국 대통령이라고 허황된 약속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최근 백악관은 “올해 말까지 260만 개의 일자리가 창출될 것”이라고 발표했다가 “너무 낙관적”이라는 비판에 직면하자 “대통령은 통계학자가 아니다”라며 슬그머니 꽁무니를 뺐다. 백악관이 한발 물러선 것은 현재 일자리 창출 속도가 예상 치의 1/3 수준에 머물자 이대로 가다 연말 대선 시점에 예측이 완전히 빗나갈 경우 정치적 공세를 감당하기 힘들다고 결론지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2년 전 연방 정부는 2004년 재정 적자가 140억달러에 달할 것으로 예측했다. 그러나 올 적자 폭은 그 37배인 5,219억달러에 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역시 2년 전 정부 당국은 2003년 일 자리가 2000년보다 340만개나 많을 것으로 전망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때보다 170만개가 줄어들었다.
올해 일자리가 얼마나 늘어날지, GDP 성장이 얼마나 이뤄질지는 경제의 신이 아니고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다. 예측이 어려울 뿐 아니라 이는 대통령을 포함 어느 개인이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정치인들은 수시로 이런 허튼 공약과 전망을 남발한다. 실제보다 더 비관적인 전망을 내놨다 나중에 국민들을 즐겁게 놀라게 하는 집권자는 없다. 국민들에 실망을 안겨줘 낙선한 뒤 경제가 좋아져 봐야 자신에게 득 될 것은 없기 때문이다. 반대의 경우는 수두룩하다.
집권자의 발언도 새겨들어야 하지만 “내게 정권을 넘겨 달라”는 야당 정치인의 주장도 마찬가지다. 현 민주당 후보들은 일자리를 사라지게 한 부시에 대한 공격에는 열심이지만 이미 이론과 실제를 통해 파산한 정책으로 판명 난 보호무역주의 이외에는 이렇다 할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경기는 독자적인 사이클에 의해 움직이며 정치인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경제 활동에 우호적인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 이외에는 없습니다. 나를 찍어 주면 이를 위해 열심히 노력하겠지만 재임 기간에 반드시 경기가 좋아진다는 보장은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한 개인의 힘으로 이룰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약속을 하는 정치인과 그런 사람에게 표를 주는 국민은 정녕 없는 것일까.
민 경 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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