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 ‘1.17’ 이렇게 써 놓고 보니 마치 난수표 같다. 무슨 의미라도 있다는 말인가. 한 미국신문에 따르면 2004년 1월19일은 특별히 기억해야 할 날이다. 2004년 1월17일도 그렇다.
장갑차와 무반동포, 기관총으로 무장한 일본 자위대가 이라크로 진입했다. 그 날이 2004년 1월19일이다. 미군이 서울에서 완전히 철수키로 합의했다. 그게 1월17일의 일이다.
올해 벽두에 일어난 이 두 가지 일은 역사적 전환점이 될지도 모른다는 거다. 1882년 이후 처음으로 서울에서는 주둔 외국군의 모습이 자취를 감추게 된다. 일본은 2차 대전 후 최초로 전투지역에 지상병력을 파견했다. 확실히 역사적이다.
그러나 그보다는 다른 데 더 무게를 두었다. 동아시아 지역의 힘의 균형에 엄청난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는 점에서다.
그 이야기는 일단 접어놓자. 그리고 또 다른 숫자 놀음을 해보자. 이번에는 ‘1.16’이다. 별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단순한 우연, 공교로운 우연의 일치로 보여지기 때문이다.
2003년 1월16일. 레이건 시절 안보특보를 지낸 리처드 앨런이란 사람이 뉴욕타임스에 기고를 했다. ‘서울의 선택 : 미국인가, 북한인가’란 제목과 함께.
반미주의 정서에 편승해 탄생한 노무현 정권에 대한 미국 측의 우려를 비공식적으로 전달한 것이다. 제목 그대로 어느 편을 선택할 것이냐가 미국 측이 던지고자 한 물음이었다.
반(反)미면 어떠냐고 했다. 미국과 북한의 분쟁시 중립을 지키겠다고 했다. 이런 노 대통령 당선자의 발언과 관련해 입장을 분명히 밝히라는 주문이기도 했다.
이런 이야기도 있었다. 진로의 선택은 자유다. 북한을 돕는 것도 자유다. 그러나 그럴 경우 지난 50년간 지속되어 온 미국의 안보지원, 그런 걸 기대해서는 안 된다.
반미물결이 넘실대는 상황에서 미군도 머물 필요가 없다. 미군은 단계적으로 철수해야 한다. 더구나 한국이 중립노선으로 간다면 한국 방위는 전적으로 한국군이 맡아야 한다.
그리고 정확히 1년, 2004년 1월16일이다. 아시안 월스트릿 저널은 ‘한국의 숙청’이라는 제목의 사설을 실었다. 어찌 보면 바로 한해 전 던진 물음에 대한 답이 나온 건지도 모른다.
한미동맹의 중요성을 강조한 윤영관 외교통상부 장관 경질과 관련된 것으로, 요지는 이렇다. 노무현 대통령이 좌파 지식인 출신 외무장관조차 포용 못한다면 한미관계는 갈 곳이 없다는 거다.
오랜 버릇은 고치기 어렵다. 노 대통령 취임 직후 미국이 보인 우려였다. 반미 성향이 어디 가겠느냐는 것. 말하자면 그게 입증됐다는 이야기다.
미국에 굽실대지 않겠다. 선동적 발언이다. 한미동맹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영 다른 말이다. 이렇게 왔다 갔다 하는 노 대통령을 상대하면서 부시 행정부는 꽤나 자제심을 보여왔다. 그리고 이렇게 경고로 끝을 맺는다. 그런 식으로 하면(한미동맹을 중시하는 외교관들을 자주외교란 이름으로 숙청하는 식) 미국의 인내심도 곧 증발해 버릴 것이다.
그리고 ‘1.17’이다. 한국의 수도 서울에서 미군을 완전히 철수한다는 합의가 발표됐다. 그 해석이 구구하다. 미국 측 입장에서 정돈하면 대충 이렇다.
미국은 수도 서울에 미군을 주둔시켜 반미감정을 유발할 필요가 없다. 한국은 미국을 영원한 방패로 인식해선 안 된다. 주한미군은 테러전쟁에도 동원될 수 있다.
그리고 한가지가 더 있다. 미국은 단순히 맹방을 보호하는 것 이상의 이해를 가지고 있다. 무슨 말인가. 북한 핵 저지와 한국 방어는 별개의 것으로 본다는 것이다. 상당히 겁나는 이야기다.
이번에는 그리고 ‘1.19’다. 일본 자위대의 이라크 진출이다. 10여년 전부터 준비해온 상황이라고 한다. 1차 걸프전 때만해도 장외에서 전쟁비용만 대야 했던 일본이다.
이 후 일본의 우파는 꾸준히 전략증강을 꾀해 왔다. 9.11이 한 계기가 됐다. 테러전쟁 발발과 함께 세계전략 포석을 새로 짜면서 미국은 일본의 등을 떠민 것이다. 재무장은 이제 일본에서는 대세다.
‘1.19’의 의미는 이제 명료해지는 것 같다. 동시에 ‘1.17’의 의미도….
동아시아에서 새로운 동맹관계가 강화되고 있다. 미국과 일본이 그 새로운 축이다. 미국은 중국의 야망을 억제하기 위해 군사대국 일본을 원한다. ‘1.19’는 그 같은 변화의 첫 걸음이다.
이 상황에서 한국의 역할은 자꾸 축소된다. 어찌 보면 필연적 수순일 지도 모른다. ‘내 갈 길만 가련다’(Going My Way)만 줄곧 제창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곡은 계속 불려질 것 같다. 총선을 앞두고 그 곡보다 더 적개심과 동정심을 유발하는 다른 노래는 없어서다. ‘마이 웨이’는 자주(自主)이고, 자주는 바로 반(反)미로 통하기 때문이다. ‘마이 웨이’의 끝은 도데체 어디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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