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상 <수필가>
미국은 중국의 이홍장 도움으로 1882년 제물포에서 거의 강압으로 한미수호조약을 체결, 오래 잠겼던 조선의 문을 열었다. 다음해인 1883년 대한제국은 견미사절단을 미국으로 보냈다. 민영익 등은 샌프란시스코를 거처 워싱턴으로 떠나며, 가는 곳마다 태극기를 들고 조선이 자주독립국임을 강조하고 자주외교를 펼쳤다. 국운은 기울어 그들의 외침이 더더욱 쓸쓸한 울림이었을 것이다. 그들 중 유길준은 미국과 유럽을 둘러보고 귀국하여 <서유견문>을 쓴, 미국 유학생 제 1호였다. 서울 친구가 사위자랑 하기에 물었더니 유길준의 후손이었다.
1983년은 사절단이 샌프란시스코에 처음 발을 디딘 지 백년이 되는 해다. 한국 정부는 두 개의 조각품을 만들어 인천 항구와 샌프란시스코 저스틴 허먼 광장에 세웠다. <움직임>이라고 명명된 조형물은 남녀를 상징하는 두 개의 형체가 서로 엉킨 모습이다. 애무하는 것도 같고 뒹굴며 싸우는 것 같기도 하다. 관리자 없이 방치해두어 주변에는 낙서와 오물이 넘쳤다. 90년에는 동판마저 도난 당해 당시 김관희 샌프란시스코한인회장이 복원 시켰다. 그리고 12년 동안 샌프란시스코 한미노인회가 조형물 주변과 골든 게이트 공원도 청소해오고 있다. 모양세가 이상해서일까, 아무튼 선물을 받은 나라의 무관심이 불유쾌하다.
1884년부터 중국인들에 섞여 샌프란시스코에 들어온 한인들은 주로 인삼장수들이었지만 개중에는 공부를 시작한 유학생들도 있었다. 이들은 철딱서니 없게 서로 상투와 깍아대기라고 부르며 암투를 벌렸다. 1902년, 샌프란시스코에 온 안창호는 행상구역 문제로 상투를 잡고 싸우는 인삼장수들을 보고 공부를 포기하고 한인들을 선도한다. 큰소리로 떠들지 말게 하고 창가에는 꽃을 가져다 주고, 커튼을 만들어다주고, 집안이나 몸에서 냄새가 나지 않게 했다. 아직도 큰소리로 떠드는 우리들에겐 그런 지도자가 요망된다.
공식적인 첫 번째 이민은 캘릭호를 타고 하와이에 온 한인들이다. 제물포를 떠나 일본 고오베의 신체검사에서 20명이 탈락하고 결국 101명이 1903년1월 13일 하와이 호놀룰루 항에 도착했다. 작년 캘리포니아 주지사는 백주년 축사에서 102명이라고 했지만 잘못된 수치다. 여러 기록을 보면 부두에서 다시 신체 검사를 실시, 8명 혹은 15명이 눈병 등으로 탈락되고 86명이 하와이에 상륙했다고 되어있다.
그 후 1905년까지 65척의 선편으로 남자 6.048명, 여자 637명, 어린이 541명이 하와이로 들어왔다. 남녀 비율은 거의 열 배가된다. 그래서 사진신부들이 오기 시작했다. 처녀들은 진취적인 영남 출신 기독교신자가 많았는데 마중 나온 신랑감 중에는 젊은 남자사진을 빌려서 보낸 늙은 총각도 있었다.
하와이에서 태어나 예일대에서 문학상을 받은 그들의 손녀딸 캐시송의 시 <사진 신부> 마지막 소절을 보자. *그 여자가 낯선 남자./ 남편의 얼굴을 대했을 때/ 남자는 여자보다 13년 연상이었다./ 여자는 공손하게 웃저고리의 비단 고름을 풀었던가?/ 그 여자의 천막같은 옷은/ 남자들이 태우고 있던 사탕수수밭으로부터/ 불어오는 건조한 바람으로 가득 했었다./*
그녀들은 엉성한 판자집에 들어가 사나흘을 대성 통곡을 하고 나면 허리를 질끈 동여매고 나와 현실을 받아드렸다. 총각 노동자들을 하숙시키고 억척스럽게 일을 하여 돈을 모았다. 한 소녀가 학교에서 돌아오니 엄마들이 모여 앉아 통곡을 하고 있었다. 일본에 모국을 뺏긴 날 이였다. 여자들은 울고 나면 큰일을 해낸다. 미국 본토로 이어지는 부인회를 만들어 임시정부에 독립운동 자금을 보내는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1919년 3.1독립운동부터 다음해 3월까지 1년 동안 노동인구 5천명이 20만 달러를 조국 독립운동 자금으로 보냈다.
남자들도 사탕수수에 몸이 베이는 노동으로 하루 10시간, 초기 임금은 69센트였다. 대부분 노동경험이 없던 그들의 일과는 험난하고 힘들었는데도 자치단체를 만들어 동족 단결과 새로운 생활 운동을 정립했으며 어렵게 번 돈을 내놓은 것이다. 20만 달러는 지금도 큰돈이다. 그들 일인당 한달 봉급이 넘는 액수였다.
노동계약이 끝나자 일부는 귀국하고 다른 이들은 본토에 들어가 공부를 계속하기를 또는 몇 년을 더 돈을 벌어 귀국하기를 원했다. 샌프란시스코를 통하여 덴버에까지 진출했다.
그러나 그 후 평생을 가짜 사진 한 장 보낼 용기 없이 총각으로 살다가 죽은 이도 많았다. 중가주 농장지대 리들리, 다누바 묘지에는 씨에라 산맥으로부터 눈바람이 불어온다. 웅크린 벽돌 위에 새겨진 이름들은 너무 추워 보인다. 그들은 우리의 뿌리다. 작년 일년동안 이민 100년을 기린 의미는 이 뿌리 위에 화해와 통일의 열매를 맺기 위한 우리들의 다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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