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 특히 신문이 온갖 정보의 유일통로이자 진위를 판별하는 유일기준이 됐던 시절이 있었다. 한국에서의 얘기다. 남들에게 새소식을 전할 때 혹은 그것의 신빙성을 보태주고자 할 때 흔히 들먹이는 게 신문에 났다는 말이었다. 뿐만 아니다. 장삼이사 갑남을녀들이 벌이는 크고작은 논쟁도 대개 신문에 났더라는 말 한마디에 판가름이 나곤 했다.
이제는 아니다.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면서 신문에 났다고 우기는 사람도 드물거니와 설사 그런 말을 들먹인다 하더라도 아직도 신문에 난 걸 믿느냐 언론이 언론이냐고 되받아치면 할말이 궁해지는 게 예사다.
세상은 그만큼 달라졌다. 우선 인터넷 등 대안매체의 발달로 기존 언론이 온갖 정보를 쥐고 흔들던 시대가 끝장났다. 게다가 언론이 돈 없고 빽 없는 사람들의 보호막이 되기는커녕 권력에 빌붙어 단물이나 빨아먹은 ‘어두운 과거’가 속속 들춰지면서 언론 자체에 대한 신뢰도가 볼품없이 구겨진 게 사실이다.
그러다보니 언론의 의제설정기능도 떨어졌다. 언론이 떠든다고 해서 안될 일이 된다거나 될일이 안되는 경우가 거의 없어졌다는 뜻이다. 한마디로 약발이 안먹히는 것이다. 97년과 2002년 대선 결과가 바로 그 증거다. 소위 메이저 신문들의 노골적인 이회창 후보 편들기에도 불구하고 유권자들은 그토록 ‘빨간 딱지’가 붙은 김대중 후보와 그토록 ‘위험 딱지’가 붙은 노무현 후보를 대통령으로 뽑지 않았던가. 더욱이 노 후보는 작심하고 메이저 언론과의 적대전선을 형성하고도-아니 어쩌면 다름아닌 그 덕분에-당선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언론에 바라는 시민들의 요구는 자명하다. 과거처럼 한눈 팔지 말고 딴 마음 먹지 말고 본연의 역할에 충실하라는 주문이다. 좋은 말도 세 번 들으면 싫어진다지만 앞으로 천번 만번 또 들어도 감히 토를 달 수 없는 지당한 말씀이다. 언론을 건전하고 건강하게 만드는 보약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연세대 북가주 동문회 김홍건 회장의 엊그제 발언은 실로 유감이 아닐 수 없다. 일요일인 14일 저녁 벌링게임의 어느 골프장 클럽하스에서 열린 송년회 때 김 회장이 행한 인삿말의 일부를 직접 옮겨보자.
…셋째는 우리 동문회도 이제는 언론플레이를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동안 라디오서울에서 행사때마다 방송을 해주시기는 했으나…
이제는 언론플레이를 할 수 있게 됐다니, 이게 무슨 소리인가.
다른 때도 아니고 언론의 역할과 사명에 대해 입 달린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마디씩 거드는 요즘, 언론과의 전쟁을 방불케 할 정도로 언론 바로세우기를 위한 진통이 계속되고 있는 요즘, 한국의 대표적 명문사학의 북가주 동문회장 입에서, 그것도 공식 행사 인삿말에서, 언론을 ‘플레이의 대상’으로 여기는 발언이 나왔다니 뱉은 사람의 입보다 듣는 사람의 귀를 먼저 의심해야 할 지경이다. 자신에게 도움이 되면 금방 뭐라도 빼줄 듯이 하다가도 조금 섭섭하면 돌아서서 동포언론도 언론이냐고 딴죽을 거는 사람과 달리, ‘언론플레이’를 할 수 있게 됐다는 김 회장의 발언은 그나마 언론으로 봐준다는 뜻이니 댓바람에 달려가 넙죽 감사의 절이라도 올려야 하는 것일까.
말은 인격과 의식의 거울이다. 얼큰하게 취한 김에 불쑥 내뱉는 말에도 인격이 배어있고 얼굴을 붉히며 다투는 도중에 왈칵 쏟아놓는 말에서도 의식이 감지된다. 하물며 미리 이리 다듬고 저리 꿰맸을 공식석상 연설원고라면 굳이 사족을 덧붙일 것도 없다. 김 회장이 그런 발언을 한 배경을 짐작케 하는 대목은 곧바로 이어진다.
…이제는 J일보의 000 동문님께서 우리 동문회의 발전으로 위해 적극적으로 받쳐주고 계시며 H일보는 게임도 되지 않음이 서서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끼리 얘기이지만 사실 J일보의 위상이, 신문의 양과 질이 전에 비해 상당히 발전된 게 사실입니다. 아직 정기구독을 하지 않으신 분들은 오늘 반드시 정기구독을 신청해주시기 바랍니다…
김 회장은 실제 연설에서는 H일보 부분을 살짝 건너뛰었다고 한다. 그래서 고맙다는 말을 하자는 건 물론 아니다. 팔이 안으로 굽는다는 걸 모르는 바도 아니다. 새삼스럽게 그동안 동문이 아니어서 언론플레이를 못했느냐고 되묻고 싶지도 않다.
그러나 지켜야 할 선이 있다. 격조와 품위는 고사하고 할말과 못할말조차 구분이 안돼서는 곤란하다. 을을 띄워주기 위해 갑을 깎아내리는 논법 또한 거슬린다. 갑을 깎아내릴 힘이 있다면 그 힘으로 을을 더 힘껏 띄워주면 그만이다. 더욱이 ‘플레이의 대상’으로 여기면서 띄워주는 말에 감읍할 사람이 있다면 그 또한 이상하지 않겠는가. 김 회장의 개인적 소신이든 동문 전체의 결집된 의견이든, 좋고 싫은 감정은 자유다. 그러나 언론더러 한편으로는 제대로 못한다고 회초리를 들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플레이의 대상으로 여기고 또 그것을 버젓이 말하는 풍토만은 사라져야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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