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가 깊은 만화가 생명도 길죠
“못나고 소심하고 남보다 인물이 잘 나길 했나, 노래를 잘 부르길 하나. 술도 마셨다 하면 다음날은 드러눕지. 뭘 하라고 하면 맨날 못하겠다고 앓는 소리나 잘 하지. 남들은 몇시간만에도 후딱 해치우는 일을 혼자 끌어안고 꼬박 밤을 새고도 내키지 않아 완전히 죽을 상을 하고 겨우 갖다주지. 난 엉터리예요.”
묻지도 않은 자기 흉을 자기가 본다. 40년이나 닳고 닳은 일을 아직도 초보처럼 스트레스에 치받쳐 일하는 노장. 일하기가 죽기보다 더 싫다.
지금도 누가 새 일을 맡기려들면 손부터 내젓는 ‘준비 안 된 일꾼’. 많을 땐 20건. 4~5년 전엔 7건까지 줄인 일을 최근엔 그마저 절반으로 제 손으로 잘라냈다. 가족들은 돈 걱정에 때로 눈치를 줘도 혼자서만 태평이다.
“이래도 살고 저래도 사는데 뭘…” 이제야 겨우 살 것 같다고 희희낙락이다. 수입은 줄었어도 이런 천국이 따로 없다. 증세가 이 정도라면 왜 차라리 폐업을 하지 않는가 묻고 싶겠지만 그건 또 안될 소리. 싫다고, 못한다고 하면서도 여태 딴 생각 한번 해본 일이 없으니 본인이 더 이해 못할 노릇이다.
“꼴찌와 한심이를 기억하십니까”
만화가 윤승운(58). 그렇게 40년을 보냈다. ‘씨’자 보다는 ‘화백’이 더 어울리는, 환갑이 다 된 나이다. 나이를 먹지 않는 건 그의 만화 속, 더 엉터리같은 주인공들이다. 40년전의 그 면면은 어째 늙지도 않는다.
윤승운이란 이름이 잘 생각나지 않는다면 이건 어떤가? 꼴찌와 한심이, 요철발명왕, 두심이 표류기. 그래도 기억나지 않는다면 그건 당신이 어리거나 젊은 탓이다. 30대만 넘어가도 그런 만화책에 둘러싸여 키득대기도 하고, 속절없이 부모님께 혼도 나고 그랬다.
그의 초창기 작품이 실린 ‘아리랑’이란 잡지까지 떠올릴 수 있다면 그건 당신도 윤 화백 못지않게 연로하셨다는 증거다. 만화가라면 으레 신문수, 길창덕, 박수동 등등과 함께 떠올려지던 쟁쟁한 국가대표급 만화가. 백발에다 앞머리까지 훤해진 지금도 그는 여전히 머리에 쥐가 나도록 만화를 그린다.
그의 달력엔 지금도 한달에 세번 마감이란 것이 있다. 사람 잡는 일이다. 마감전 며칠은 몸도 마음도 사람꼴이 아니다. 세수도 안 하는 판에 수염은 더더욱 깎을리가 없고, 때 되면 밥만 후딱 먹고는 시간이 아까워 양치질도 안한다. 몇날며칠이고 그렇게 반 폐인이 된다.
줄담배를 물어가며 주로 야음을 타서 작업한다. 아주 급할 때가 아니면 낮엔 시간이 남아돌아도 일하지 않는다. 진도도 안 나간다. 일하기 싫은 만화가답게 수시로 농땡이도 친다. 틈만 나면 어떻게든 정신노동에서 달아나보겠다고 톱을 10개째나 망가뜨려가며 수시로 나무를 베고 못질을 하는 단순노동만 골라한다.
그래서 펜을 잡고 사는 사람이 피부는 막노동판 일꾼처럼 구릿빛이다. 예전엔 특별한 병도 없이 시름시름 해골처럼 말랐던 몸이다. 어쨌거나 옛날처럼 일에 겁나지는 않으니 다행이다.
만성 변비환자처럼 고통스런 작업은 여전하지만 타고난 성격을 어찌 바꾸랴. 물려받은 재능이 없으니 남보다 더 열심히 하기라도 해야한다는 생각이 머리에 박혔다. 재미있든 어떻든 초스피드로 일을 해치우는 주변의 ‘천재’들이 그는 정말 부럽다.
망한다는 역사만화가 스테디셀러 돼
가까운 동료 만화가들은 그런 소리도 했다. “당신 일할 때 인상쓰는 걸 보니 꼭 당신 만화에 나오는 주인공 얼굴이더라.” 닮은 게 인상뿐이랴. 20년 전부턴 그의 만화속 맹꽁이가 유식해지기 시작했다.
1960년대엔 좌충우돌로 말썽만 부리던 그 악동이 어느새 유창한 한문을 구절구절 읊조리고, 교과서에도 안나오는 역사 얘기까지 조목조목 풀기 시작했다. 바로 윤승운이 그렇게 변했다. 근간에 볼 수 있는 윤승운의 만화는 대개가 그런 역사만화다.
화끈한 성인만화가 잡지마다 봇물을 이룰 때도 그는 여전히 아이들만 그리고 있었다. 만화도 작가의 자식. 당장 뜨겁기보다 은근슬쩍 웃기고 뭉근하게 따뜻한 느낌이 꼭 애비인 윤 화백을 닮았다.
처음 역사만화를 그린다고 나섰을 땐 다들 쌍수를 들고 말렸다. 절친한 한 출판사 사장은 “당신, 이제 망했다”고 앞질러 위로까지 했다. 그런데 망한 것 같지는 않다.
요즘같은 출판계 불황에도 연간 1~2만부씩 꾸준히 팔려나가는 스테디셀러. 그는 저력이 있다. 만화가 40년의 내공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것이 아니다.
사학자도 아니면서 역사를 넘보자니 자연히 고통은 더했다. 처음엔 자료라고 가진 것이 달랑 책 한권. 지금은 2,000권으로까지 불어났다. 1980년대만 해도 역사 관련 책이 별로 없어 그저 닥치는대로 찾아 모으는 수밖에 길이 없었다.
헌 책방도 이 잡듯이 뒤지고 길거리의 덤핑책까지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나중엔 중국까지 찾아가 자료를 구하기도 했다. 어떤 건 채 번역본도 나오지 않은 원서라 짧은 실력으로 수십번씩 새겨가며 직접 독해한 것도 있다.
성균관대 사회교육원에서 하루 4시간씩 7년간 한문을 공부, 자료만으론 모자랄 듯 싶어 책에 나오는 유적지마다 직접 답사도 돌았다. 김삿갓 묘는 다섯번 이상이나 다녀왔고, 전국 방방곡곡 안 가본데가 없다. 가만히 있어도 진땀 흘리는 일을 더 사서 고생이다.
그래도 표시가 나긴 나는 모양. 한마디 내색을 안 해도 원고를 받아든 출판사 사람들은 “선생님 만화는 참 힘들게 쓰신 게 보인다. 대체 이런 얘기를 어디서 찾아내셨냐”고 물어보기 일쑤다. 나이 스물이 됐건 쉰여덟이 됐건 그는 물속의 발길질을 멈추면 당장이라도 제 풀에 제가 먼저 쓰러질 오리다.
두려움 속에 만화로 밥먹기 시작
은광고를 졸업한 후 같은 반 친구 하나와 우연히 마주친 적이 있다. 작업중이던 그를 보자마자 그 친구가 어이없다는 듯 소리쳤다.
“야, 네가 무슨 그림을 그린다구!” 주위의 친구들도 몰랐을만큼 그는 지극히 평범하고 내성적인 학생이었다. 교과서보다 만화책이 좋아 공부도 건성. 화가를 꿈꾸며 그림도 곧잘 그렸지만 그것으로 대성할 정도는 아니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직접 만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시험삼아 한 은행 사보에 몇번 만화를 실은 뒤 완전히 재미가 붙었다. 집중적으로 각종 잡지사나 일간지 같은 곳에 독자만화를 밀어넣기 시작했다. 누가 불러준 것도 아니다.
밤새 생각해 그려낸 뒤 무작정 잡지사 편집국 등을 찾아가 꾸벅 인사하고는 원고를 주고 돌아서 나오는 게 전부였다. 그것이 곧잘 채택돼 신문에 이름자가 박힌 채 나올 때엔 그런 쾌감이 없었다.
그것을 2년쯤 계속 하다보니 어느 순간 정식 청탁이 날아들었다. 처음으로 제의받은 것이 당시 인기잡지인 아리랑의 2페이지짜리 만화. 막상 ‘대작’을 맡으려니 겁이 나기 시작했다. 능력도 안되는 일을 괜히 맡았다고 집에서 밤새 앓았다.
밤을 꼬박 샌 채 그린 것을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넘겨줄 땐 “이것 밖에 안되느냐”고 손가락질이라도 받을까봐 온 얼굴이 화끈거리고 무서웠다. 도망치듯 나와 나중에 돌아보니 별 탈도 없는 것을. 집에선 가족들이 걱정했다.
만화로는 밥 먹고 살기 힘드니 농사를 짓는 게 좋겠다고 했다. 그도 그러고 싶었다. 여차하면 농사꾼이 될 생각으로 연세대 농업개발원 낙농과에도 다녔고, 거기서 만난 여자동창과 결혼도 했다.
그러나 싹이 보이지 않으면 곧 그만둔다 그만둔다 하던 것이 7~8년을 더 끌었다. 스물다섯 무렵엔 이미 몇몇 잡지의 연재만화를 담당, 이름이 알려졌고 결혼 후엔 결혼 후대로 흐지부지 농사 얘기가 넘어가고 말았다.
일이 무서워 더 많이 일했는지 모른다. 지금까지 내놓은 책만 약 160여권. 1년에 평균 네권씩 정신없이 그려냈다.
그리고 마흔이 가까워질 때쯤 갑자기 역사에 관심이 쏠리기 시작했다. 젊었을 적 할아버지 서가에서 역사책을 꺼내읽으며 언젠가는 꼭 만화로 그려보리라던 기억이 자꾸만 되살아났다. 결국 밥을 굶어도 좋다며 그 꿈을 옮기고 나섰다.
이후 왕조별 연대기인 ‘맹꽁이 서당’ 시리즈, 삼국시대부터 근세의 인물로 훑어내린 ‘겨레의 인걸 100인’ 시리즈 등 가까운 최근까지도 20년째 그 걸음이 계속되고 있다. 청소년 권장도서 단골 목록.
밀려오는 일본만화 “표절은 자살행위”
만화가도 변했지만 세상은 더 많이 변했다. 어려선 기성세대로부터 박대를 받던 만화가 1991년부턴 정부가 앞장서 만화문화상이란 것까지 제정해 만화가에게 상을 주는 시절이 됐다. 그 첫 수상자가 바로 그였다.
지난 1994년 서울 정도 600년을 맞던 해는 그의 책 몇권도 타임캡슐에 담겨 묻히기도 했다. 개봉연도 2394년. 또 어떤 세월이 돌아올지 그도 궁금하다.
요즘 국내 만화시장을 보면 격세지감이 더 크다. 왕성하게 밀고 들어오는 일본 만화, 자칫하면 우리 안방 내주기도 시간문제다. 들어오는 녀석도 밉지만 근시안의 국내 풍토가 뭣보다 걱정스럽다.
“베껴먹거나 따라가는 게 문제예요. 표절은 자살행위입니다. 멀리 내다보고 우리 것을 개발해야지, 베끼면 단명하기 마련입니다. 우리 세대 만화가들은 IMF 불황 때도 끄떡없이 지냈어요. 그만큼 뿌리가 깊기 때문에 생명도 긴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어쩌면 언제 짐을 싸야할 순간이 올지 몰라서 1974년 농부 연습 삼아 미리 7년을 들어가 살았던 경기도의 한 허술한 농막에서 그는 요즘 생활 겸 작업을 하고 있다. 언덕배기 집 뒤론 초록색 야산의 작은 밀림이 펼쳐 있고 한 식구 먹을 만큼만 가꿔내는 고추, 가지 등속이며 약 200그루 배나무의 배 익는 맛에 더더욱 인생이 즐겁다.
행여 그 즐거움을 깨뜨릴 새라 아무리 자원방래하는 유붕이라도 일감만 부탁하면 불역열호아가 불가능해지는 윤 화백. 언젠가는 사서삼경을 만화로 옮기고 싶다는 바램을 입밖으로 냈다가 귀신같이 계약금까지 싸들고 달려드는 초스피드 출판업자 때문에 이젠 뭘 하고 싶다는 소리조차 맘대로 다 못한다.
극성스레 설레발을 잘 친다고 해서 이름까지 ‘설리번’으로 비틀어 만든, 왈패 두목같은 푸들 한 마리도 마음 여린 그 앞에선 숫제 상전노릇.
딸들이 넘겨주고 간 개 두 마리 뒷수발을 맡다가 그 잘 먹던 보신탕도 이젠 마음에 걸려 못먹겠더라는 그는 헤어질 즈음에야 불쑥 진작에 했어야 할 질문이 그제서야 생각난 모양이었다. “아, 참, 그런데 왜 나를 찾아왔어요?” 아주 어려서 보았던 얼렁뚱땅 만화주인공 두심이가 거기 서 있었다.
정영주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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