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섭 사회부 부장대우
초선으로 워싱턴 DC 정가에 진출한 김창준 의원에게 유대인 로비스트가 책 한권을 들고 찾아와 흥미로운 제안을 했다. 책을 받으면 5,000달러의 정치 헌금을 제공할 것이고 그 책을 다 읽으면 5,000달러를 추가한다는 제안이었다. 로비스트가 내민 책에는 2차대전 당시 수백만명의 유대인들이 나치에게 학살됐던 ‘홀로코스트’의 참상이 담겨 있었다.
워싱턴 정가의 초선의원들에게 유대인들이 찾아가 자신들의 고난 역사를 펼쳐 보이며 로비를 전개한다는 것이다. 책을 읽지 않더라도 받는 것 자체만으로도 그들은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한다. 김창준씨가 연방하원의원 시절, 가든그로브의 한인 라이온스 클럽 초청 강연에서 들려준 이야기다. 서구 사회에 팽배해 있는 반 유대 정서에 대처하는 유대인들의 슬기가 엿보인다.
이민 100년이 지난 한인들은 과연 무엇을 보여줄 수 있을까.
타운을 왕래하는 미국 정치인들은 수도 없이 많지만 이들이 한인사회를 얼마나 이해하고 어떤 일을 해줄 수 있을까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유사시 우리편에 서서 방패막이가 될 정치인들은 얼마나 되나 궁금하다. 혹시 ‘수전노’ 한인들에게서 돈만 받나내면 된다는 생각을 주는 것은 아닐까 걱정된다. 이들에게 정치 헌금을 내주는 한인사회는 대가를 생각해 본적은 있을까.
한인타운을 포함하는 제10지구 LA시의원 선거때 유력 후보의 선거비 대부분이 한인들의 주머니에서 나왔다. 투표권자는 많지 않지만 돈은 잘 준다는 소문이 정치인들 사이에 나도는 것도 사실이다. 달라면 주는 ‘인심 좋은’ 한인들로 각인될 까 우려도 된다.
남가주 산불 피해자들을 돕자는 기금 모금 캠페인을 보면서도 기분은 씁쓸했다. 1992년 4월29일 백인 경찰의 흑인 폭행 사건으로 촉발된 폭동으로 수만명의 한인들이 삶의 터전을 잃고 절규했을 때 한인들을 위한 기금 모금 캠페인은 어느 곳에서도 없었다.
타운을 찾는 한국 정치인들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얼마전 청와대 문희상 비서실장의 LA 간담회가 구설수에 오른 적이 있었다. 간담회가 아니라 현정권 실세의 일방적 훈계였다며 분개하는 한인들도 많았다. 하지만 정치인 탓 할일 만은 아니다. 한국에서 정치인이 온다면 만사 제쳐놓고 얼굴 내밀고 악수하려는 한인들이 줄을 서는 모습은 더 이상 낯선 장면은 아니다.
한인들이 애지중지 모셨던 이들 정치인들이 귀국해 한인사회를 위해 노력했다는 소식은 별로 듣지 못했다. 한국 국회에 상정된 재외동포법 개정안도 많은 국회의원들의 외면 속에 교포출신 의원들만이 고군분투한단다. 13일 열린 대책회의에서 원로급 인사는 국회의원들 쫓아다니며 골프 치고 술이나 사준 결과가 이거냐며 한인들의 각성을 촉구하기도 했다.
귀국하는 LA 한국 공관원이 재미있는 말을 하고 떠났다. IMF때 미국 한인들이 한국에 돈을 보내 고맙지만 양으로 보면 별거 아니다고 했다. 한국에 돈 좀 보낸 것 가지고 큰소리 치는 한인들이 많다는 지적과 함께. 과연 그의 말이 옳은 것일까.
뼈를 깎는 고통 속에서도 우리 선조들은 한국의 독립을 위해 돈을 모아 보냈다.문대양 하와이주 대법원 판사는 지난 1월 이민100주년 개막식에서 수입에서 30%나 되는 거금을 떼어내 독립자금으로 보낸 부모님과 선조들이 자랑스럽다고 밝혔다. 당시는 UC버클리를 나온 한인 인텔리 여성이 제대로 된 직업을 구하지 못해 백인집 가정부로 일해야 했던 시절이다.
먹고살기도 힘든 선조들이 허리띠 졸라매고 조국 독립에 목숨을 바쳤다. 총을 들고 전투에 나선 독립군은 총알이 무서웠지만 우리 선조들은 이국 땅에서 겪어야 할 가난이 두려웠던 시절이다. 미주 한인들은 대한민국의 민주화에도 기여했다. 김대중 대통령이 독재정권에 밀려 미국으로 쫓겨왔을 때 그의 복권 사면운동을 전개하며 민주화 투쟁을 했던 주축 세력도 미주 한인들이었다.
선진국 대열에 오른 한국의 오늘이 있기까지 미주 한인들은 부단히 노력해왔다. 우리의 이런 노력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는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미국에서도 한국에서도 대접받지 못하는 한인사회가 된 것 같아 답답하다.
1세들이 초석을 다진 100년 역사도 금년으로 막을 내리고 내년이면 2세들의 몫이 될 또다른 100년이 시작된다. 새로운 미래를 맞이하는 2세들에게 우리는 무엇을 넘겨 줄 수 있을까 고민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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