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렘린놀로지(Kremlinology). 오랜만에 들어보는 말이다. 소련정부 연구학 정도로 정의 될 수 있다. 그런데 말이 학문이고 실상은 암호해독 작업 같은 게 크렘린놀로지다.
철의 장막이 굳게 드리워 있다. 그러므로 크렘린이 발표한 성명서나 분석하고, 정치국원들이 도열한 사진이나 보면서 어렴풋이 나마 소련당국의 의중을 파악해 내는 게 고작이었다.
이제는 소비에톨로지가 유행이라고 한다. 연구방법이 크렘린놀로지와는 전혀 다르다. 소련제국이 무너지면서 온갖 정보가 쏟아져 나온 탓이다.
새로운 사실들이 발견된다. 동시에 여러 면에서 재평가도 이루어지고 있다. 뭐 새삼스러울 것은 없지만 공산주의 소비에트 체제가 얼마나 비인도적이고, 무자비한 체제였는지 그 면모가 구체적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다.
소련은 밖으로 극히 위협적 존재였다. 안으로 소련시민에게도 악몽 같은 체제였다.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 되고 있다. 붐을 맞고 있는 소련연구의 하나 같은 결론이다.
’악의 제국’ 소련의 이런 면모를 여실히 밝혀낸 저서 가운데 하나가 앤 애플바움의 ‘굴라그’다. 테러가 제도화된 소련의 강제 수용소를 유대인 수용소와 비교하면서 애플바움은 스탈린 체제를 나치 히틀러 체제와 똑 같은 악의 제국이라는 평가를 내리는 데 주저함이 없다.
또 새로이 조명되고 있는 현상은 미국의 지성인, 주요 공직자 중 적지 않은 사람들이 소련의 실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1920년대부터 있어온 현상으로, 소련에 대한 이런 환상이 미국의 해외정책결정에 상당한 영향을 끼쳐왔다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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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타임스는 대공황 시절 소련을 꽤 매력 있는 경제모델로 보고 있었다. 30년대 미국인들은 스탈린의 집단농장제도를 대공황을 맞아 식량 배급을 타려는 기나긴 행렬의 대안으로 생각하는 경향이었다. 조지 버나드 쇼는 소련을 이상향으로 보고 있었다. 이런 지식인이 그리고 하나 둘이 아니었다.
이런 정서의 흐름은 냉전시대를 지나 소련제국이 무너진 90년대까지 일부에서나마 계속 이어져왔다는 이야기다.
컬럼비아 대학은 최근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 70여년 전 뉴욕타임스 기자 월터 듀런티에게 수여한 퓰리처상을 취소키로 한 것이다. 소련제국의 잘못된 신화는 공산주의 우상의 붕괴와 함께 무너져야 한다는 이유에서다.
듀런티는 1932년 스탈린을 소련국민이 염원해온 진정한 영웅으로 묘사해 보도했다. 퓰리처 위원회는 밀도 있고 공정한 보도라는 찬사와 함께 그를 퓰리처상 수상자로 선정했다. 그는 일약 언론계의 양심으로 떠오른 것이다.
듀런티는 그러나 수백만의 인명을 앗아간 스탈린의 대대적인 피의 숙청, 우크라이나 참사는 철저히 외면했다. 대신 스탈린 체제의 일방적 프로퍼갠더만 표절하다시피 전한 것이다.
퓰리처상 수상취소 결정은 새로운 소련연구의 재평가 작업의 하나다.
왜 그런데 뒤늦은 소련 연구 붐인가. 과거의 적, 소련에 대해 적지 않은 정책상 오류가 있지 않았는가 하는 반성에서다.
70년 전, 아니 2차 대전 직후만 해도 소련이 미국의 적이 될 것으로 예견한 사람은 별로 없었다, 게다가 냉전이라는 기나긴 전쟁에 돌입할 가능성을 내다 본 사람은 극소수였다.
소련 연구는 오늘날 이런 면에서 상당한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미국이 맞은 새로운 적의 실체는 단순한 테러집단인가, 아니면…. 아프가니스탄전쟁은 세계적 대 전쟁의 서곡이 아니었을까 등등의 질문에 뭔가 실마리를 줄지도 모른다는 점에서다.
크렘린놀로지는 사어(死語)가 된지 오래다. 이제 남은 건 ‘평양올로지’밖에 없다고 할까. 스탈린 체제를 한 술 더 뜬 게 김정일 체제로, 그 속성이 마치 블랙홀을 방불케 해서다.
이 상황에서 한번 이런 가정을 해본다. 어느 날 김정일 체제가 무너졌다. 평양올로지는 필요 없다. 모든 정보가 공개됐으니까. 진정한 의미의 북한 공산체제 연구가 붐을 이룬다.
어떤 발견들이 이루어질까. ‘한국판 듀런티’ 같은 인물이 발견되지 말란 법도 없지 않을까.
위대한 저서는 커다란 죄악이다. 고대 알렉산드리아의 시인이 남긴 말이다. 오류를 범할 수밖에 없는 인간 양심의 외침이다. 진실을 고의로 왜곡시키는 위작(僞作)은 그러면 무엇인가. 지적인 테러행위다. 그것도 아주 비열한.
평양올로지가 필요 없게 되는 날, 그 때에는 그 테러리스트들의 정체도 드러나겠지….
옥세철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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