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는 종신대통령을 꿈꾸었지만 일장춘몽으로 끝났다. 스릴러 영화에서처럼 긴박한 과정을 거쳐 권력을 잡은 전두환은 어떻게 해서든 정권을 연장하려 했지만 노태우에게 넘겨줄 수밖에 없었다. 문민대통령 김영삼, 김대중은 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지도자로 자리 매김하고 싶어했지만 퇴임 후 허망함만을 들이키고 있다.
사람에게는 ‘운’이 있다. 이는 점성술에서 말하는 운세가 아니라 가을에 잎이 떨어지는 이치와 같다. 도도히 흐르는 대세는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다. 정치도 예외가 아니다. 영원할 것 같은 권력도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고 백전백승의 지략도 무한 질주할 수 없다.
미국을 방문한 황장엽씨가 80의 노구에도 불구하고 정치 논쟁의 한복판에 서 있다. 독재반대 인권보호 등 황씨의 발언은 구구절절 인본주의적 향기를 내뿜는다. 그의 발언을 둘러싼 찬반 시비를 논하자는 게 아니다. 자신의 ‘운’이 다해가고 있음을 황씨가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아 안타까울 뿐이다.
황씨는 대단한 인물이다. 그는 1972년 북한 최고인민회의 의장 겸 상설회의 의장에 오른 뒤 1997년 망명 전까지 20여년간 북한 권부의 핵심이었다. 또 그는 김일성의 주체사상을 체계화해 북한 내부는 물론 제 3세계에 전파하는 등 이론가로서의 명성을 날렸다.
그런 황씨의 진짜 망명동기는 자신만이 알겠지만, 많은 친인척이 숙청될 것을 알면서도 처자식을 남겨두고 혈혈단신 떠나온 것을 보면 ‘반독재 인권회복 전도사’로서의 숙명을 타고났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황씨는 비운의 정치인이다. 북한 최고의 이론가인 그가 고향을 등진 것은 북한에서 자신의 뜻을 더 이상 펼칠 수 없다는 현실 인식에 바탕을 둔 것임을 부인할 수 없다. 평생을 바친 조국이 자신을 버렸다는 배신감과 ‘금이야 옥이야’ 대접받던 자신의 처지가 변한 데 대한 분노가 화학작용을 일으켜 폭발했을 수 있다. 이것이 황씨의 첫 번째 좌절이다.
망명 후 국정원 산하 통일정책연구소 이사장으로 있으면서 강연회 등에 나가 열변을 토하던 황씨는 김대중 정권이 들어서 김정일 정권과의 화해를 추구하면서 ‘찬밥’ 신세가 됐다. 정부는 황씨를 계륵처럼 뜨악해 했다. 황씨는 약 3년만에 통일정책연구소 이사장에서 해임됐으며 이후 줄곧 ‘요주의 인물’이 돼버렸다.
큰 맘 먹고 시도한 망명이 성공했고 일정기간 극진한 예우를 받았지만 세상이 바뀌면서 ‘오리알’이 된 것이다. 남한 정부는 그의 경륜과 식견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기는커녕 순수한 의미로도 활용하려 들지 않았고 입막음에 총력을 기울였을 뿐이었다. 남한을 철썩 같이 믿었던 황씨의 두 번째 좌절이다.
우여곡절 끝에 황씨가 미국을 방문해 김정일 타도를 외치고 있다. 망명 이후 그의 신념에는 일관성이 있다. 북한에 강성 태도를 견지하고 남한의 대북 우호자세를 견제해 온 부시 정권이 황씨에겐 마지막 기댈 언덕이었다. 대북 강경파가 득세하던 몇 달 전에 미국에 올 수 있었더라면 황씨의 몸값은 엄청났을 것이다.
헌데 김정일에 독설을 퍼붓던 부시가 요즘엔 ‘부드러운 남자’로 변했다. ‘도’ 아니면 ‘모’가 아니라 어떻게든 북한 핵 위기를 외교적으로 해결하려고 고민한다. 이라크에서 꼬이고 중동평화가 물 건너간데다 대선이 점점 다가오니 한반도에서만은 조용히 일을 마무리하려는 부시에게 황씨의 자존심은 고려대상이 아니다.
독재정권을 봐주고 인권침해에 눈감는다는 비난을 받더라도 우선 핵 문제를 원만히 타결하는 게 부시의 지상과제다. 핵 포기를 조건으로 독재정권을 용인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황씨의 주장은 얼마 전만 해도 미국의 전폭적인 지지를 낚았을 것이다. 그런데 불과 몇 달 사이로 부시가 ‘제로섬’에서 ‘논 제로섬’으로 방향을 틀었다. 이것이 황씨의 세 번째 좌절이다.
박봉현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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