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복희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 결실을 맺는 가을이 왔다. 입추가 지나면 후텁지근한 여름의 잔해가 사라지고 한 낯의 따가운 햇살이 가을임을 느끼게 한다. 손바닥처럼 ‘쫙’ 펴졌던 초록빛 나뭇잎들도 접은 부채모양이 되어 가을을 재촉한다. 자연 안에는 크고 작고 상관없이 그대로 아름답고 뜻깊은 것들이 가득 차 있다. 비록 생김새는 작지만 도토리를 보고 있노라면 시시하게 살아가는 사람에게 위안을 준다. 떫고 쓴맛을 제거하고 나서 맛있는 음식으로 사람들의 좋은 먹거리가 되어주는 도토리, 작은 것이 아름답고 작은 것이 깊어 보인다.
오래 전 이맘때쯤이면 어른들을 따라 도토리를 따러 산으로 갔다. 망치로 참나무 중간을 쿵쿵 치면 도토리는 우박처럼 와르르 떨어졌다. 이미 바람의 떨어져 뒹구는 도토리와 새로 떨어져 내린 도토리로 인해 가지고 간 자루는 금새 가득 채워졌다.
도토리를 따러 갈 때 조심해야 하는 것이 독이 있는 뱀이나 벌이다. 그 날도 올케언니와, 나, 동생 셋이서 동네 가까운 우리 산으로 도토리를 따러갔다. 밭을 둥그렇게 에워싼 산에는 참나무라 통칭되는 상수리나무, 갈침나무, 떡갈나무, 과의 나무들이 잔뜩 있다. 올케언니는 앞서가며 도토리 나무를 망치로 치고 우리는 주워담는 일을 했다. 갑자기 으악하는 올케언니의 비명소리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소리나는 쪽을 바라보니 올케언니는 밭고랑으로 뛰어가고 있었고, 벌떼는 하늘로 ‘쫙’ 퍼져 날아갔다. 그런데 몇 마리의 벌은 올케언니를 계속 따라가는 게 아닌가. 동생과 나는 밭고랑 끝에 엎드린 채 그 광경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모든 게 순간의 벌어진 일이다.
밭고랑을 몇 바퀴 뛰던 올케언니의 다리가 후들거리는지 비틀거리기 시작했고 얼굴은 흙빛이 되었다.
농촌에 살다보면 상식적으로 알아야 하는 게 있다.
(뱀이 따라오면 꼬불꼬불한 길로 도망을 가고)
(벌이 따라오면 바닥에 쫙 엎드려라)고, 어른들은 늘 말씀해 주셨다.
나는 올케언니를 향해 형 밭고랑에 엎드려, 소리를 질렀다. 지친 올케언니는 밭고랑에 엎드리고 따라가던 벌은 올케언니 키 높이로 휘익… 날아가 버렸다. 마른침을 삼키며 올케언니를 바라보던 우리는 방금 걱정했던 것도 잊은 채 허둥대며 뛰던 올케언니의 모습을 생각하며, 배꼽이 빠지게 웃었다. 그 충격으로 올케언니는 한동안 산을 멀리했다. 아니, 가지 않았다.
가을에 잔뜩 따놓은 도토리로 어머니는 묵을 쑤셨다. 도토리는 껍질을 벗기고 알맹이를 말려 방앗간에서 가루로 만든 다음 물에 담가 우려낸다. 짙은 갈색으로 우러나오는 물을 계속 갈아주다 보면 떫은맛을 제거해 준다. 사람의 입맛에 맞게 하기 위해 자신의 독성을 씻어내야 하는 도토리를 보며 온갖 오물 투성이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도토리처럼 씻어낼 수는 없을까, 생각해 본다.
이십여일이 지나면 도토리묵을 쑤어 여러 개의 쟁반에 가득 부어 놓는다. 먹기 좋게 굳어지면 반듯하게 잘라서 동네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기도 한다. 먹거리가 다양하지 않았던 겨울밤, 어머니는 김치를 송송 썰어 갖은양념에 참기름 몇 방울 넣어 무쳐주시거나 양념장을 뿌리고 마른 김을 부수어서 얹어주시곤 하던 도토리묵 맞을 잊지 못한다.
도토리묵은 녹말이 들어 있고 쌉쌀한 맛은 탄닌 성분 때문이라고 한다. 가뭄이 들수록 도토리는 많은 수확을 하며, 참나무 한 그루에서 많게는 4만여개의 도토리가 달린다고 한다.
요즈음은 식품산업이 발달되어 묵에도 인공 첨가물이 들어가 고유의 도토리의 맛을 잃은 지 오래다.
도토리 특유의 떫고 쌉쌀한 맛도 없을뿐더러 옛날 어머니들이 볼품 없이 만들었던 투박한 모습도 찾아볼 수가 없다. 마켓에 가면 반들반들하게 잘 쑤어진 도토리묵을 진열장에서 흔히 볼 수 있다.
볼품 없이 작아 ‘도토리 키 재기’라는 말이 있지만 가난한 시절 서민들의 구황작물로 사랑을 받았고, 동네에 경사가 있을 때마다 묵을 쑤어 덩이로 날라주었던 푸짐한 옛 인심이 그리워진다.
내일은 마켓에 가서 도토리묵을 사다가 양념장을 솔솔 뿌리고 마른 김을 부수어서 얹어 먹어야겠다. 떫고 쓴맛을 제거하고 나서 맛있는 음식으로 변화되어 우리에게 좋은 먹거리가 되는 도토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더욱 절실해 지는 요즈음이다.
한국 수필문학 등단
재미 수필 문학가협회 이사
한국 문인 협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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