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 이민 100주년과 한미동맹 50주년을 맞은 오늘의 한미관계는 그 어느 때보다도 껄끄럽고 혼란스러운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라크 전쟁을 전후에서 국내외에서 치솟던 반미감정이 아직도 수그러들고 있지 않는 가운데 지금 한국에서는 미국이 요청한 이라크 파병을 수락할 것인지에 대해서 불편한 논의가 계속되고 있다. 모름지기 국가간의 동맹이란 것이 바로 이런 경우에 서로 협력하자는 취지에서 맺어두는 약속일진대 이유야 어쨌든지 지금 그 약속을 선뜻 이행하지 못하는 한국의 입장이 안타깝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미국은 그동안 늘 한국의 옆에서 힘이 되어주고 도움의 손길을 뻗어주던 동반자가 아니었던가. 게다가 미국은 자타가 인정하는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이 아닌가. 그런 미국이 모처럼 한국에게 도움을 요청해 왔는데 왜 한국은 이를 기꺼이 받아들이지 못하는가.
생각건대 그 이유는 최근 한국인들의 사고가 다분히 민족주의적 이념을 바탕으로 형성되어 왔고 현 포퓰리스트 정권의 정책 수립과 집행이 이러한 이념적 사고에 크게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최근 한국 내 민족주의적 사고에 의해 전개되는 논의의 예를 들어보자면 다음과 같은 얘기를 할 수 있다. 북한은 우리 민족이다. 따라서 북한은 우리에게 공조의 대상이지 적이 될 수 없다. 한편 민족분단의 원인을 제공한 미국은 우리의 자주성을 해치는 존재이다. 즉 우리는 미국으로부터의 수혜자가 아니라 피해자이다. 따라서 미국은 한반도에서 철수해야 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한국인들의 이러한 민족주의적 사고를 잠시 걷어내고 미국에 관한 현실적 사고와 행동을 살펴보면 극단적인 대조를 이룬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일부 과격 학생들이 미군기지에 들어가 성조기를 불태우는 동안 다른 편에서는 한국의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미국 교과서로 영어공부를 시키려는 열기가 광기에 이르고 있는 것을 볼 때 알 수 있다.
이러한 극단적인 대조는 한국 사회의 모순이자 병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민족분단의 빌미를 제공했다는 그 미국, 우리의 자주성을 해쳐 왔다는 그 미국, 그리고 우리에게 혜택을 준 것이 아니라 피해를 주었다는 바로 그 미국이 많은 한국인들에게 유학과 이민과 원정출산과 사업과 신병치료와 망명과 은신과 도피의 목적지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에서 미국을 대하는 시각이 껄끄럽고 혼란스러운 이유는 이렇게 민족의 자존심을 구름 위에 올려놓고 흥분하고 있는 민족주의적 사고와 개인들의 현실주의적 권익추구 행위가 서로 갈등하고 충돌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족주의든 실리주의든 우리는 현 시점에서 한미간의 동맹관계가 비롯하게 된 원천적인 동기를 다시 한번 확실하게 인식해야 한다.
근현대사를 통해서 한국과 미국이 두터운 우호와 동맹관계를 유지하게 된 것은 본질적으로 한국의 자유를 보전한다는 명분 때문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한국의 자유를 보전하기 위해서 한국은 물론이고 미국도 같이 피를 흘렸고 지금도 같이 대가를 지불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상기해야 할 것은 해묵은 진리이지만 언제까지나 진리로 남을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는 말이다. 아직도 미군이 한국에 주둔함으로써 우리가 대가를 치르고 있다면 그것은 자유를 보전하는데 들어가는 엄청난 비용중의 일부라는 것을 알아야겠다.
민족주의적 사고에 심취하는 한국인들은 ‘반미하기’ ‘미국 때리기’ ‘미국 음모이론 만들어 내기’ 등을 통해서 짜릿한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도 있다. 이렇게 현실과 격리된 민족주의적 사고와 아울러 조그만 감성적 움직임에도 이리 저리 휩쓸리기 일쑤인 한국의 독특한 국민정서가 미국을 제대로 이해하는데 걸림돌이 되고 있다. 결국 대통령으로부터 대다수 일반 국민에 이르기까지 아직도 한국인들은 미국을 잘 모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세계 주요 국의 하나로 자리 매김하고 있는 한국으로서 초강대국이자 동맹국인 미국을 바로 이해하는 것은 그 어느 때보다도 절대적이고 필수적이다. 미국에 대한 부정확한 인식과 몰이해는 우리에게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나 바람직하지 않은 결과를 가져온다. 과거에도 그랬지만 한국의 현실과 장래의 큰 부분이 미국과의 관계에 의해서 결정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민족주의적 반미나 현실주의적 친미를 논하기 전에 미국을 제대로 알려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한다
만일 미국이 한국에게 가해자라면 오늘도 유학과 이민과 원정출산과 사업과 신병치료와 망명의 목적으로 미국을 찾는 한국인들의 행렬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무엇이 우리를 미국으로 끌어들이는가? 미국의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미국이 추구하는 가치와 이상은 무엇인가? 미국과의 교류를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서로 주고받을 수 있는가? 오늘 우리는 이런 물음에 대한 답을 찾는 노력을 통해서 동맹국 미국을 제대로 이해해야 하겠다.
일리노이주립대 교수 장석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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