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모종 2개와 고추모종 6개를 화단 귀퉁이에 심었다. 일주일쯤 되었을 때에 물을 주려고 가보니 가지모종은 앙상한 줄기만 보일 뿐 잎사귀는 모두 어느 곤충에 의해 갉아 먹힌 것 같았다. 주위를 유심히 살펴봐도 눈에 띄는 벌레는 없는데 참으로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런 대로 고추모종은 잘 자라 주었다. 하루가 다르게 윤기가 도는 잎새의 모양으로 보아 뿌리를 쑥쑥 내리고 있는 것 같았다. 고추 모는 크기에 비해 비교적 많은 곁가지를 치고 작고 흰 꽃망울을 여러 개 달고 있었다. 이것들이 모두 열매를 맺게 된다면 올 여름에는 풋고추 따서 된장찌개 끓이고 가을에는 붉은 고추 다져 넣고 제법 얼큰한 육개장이라도 끓여 나누어 먹을 수 있을 것 같다.
하루가 다르게 쭉쭉 뻗으며 자라는 것이 신통해 시간 있을 때마다 문안드리고 주변에 잡풀도 뽑아주며 정성을 기울였다. 꼭 어린아이 키우듯 살갑게 돌봐주었다.
결혼 후 처음 집을 장만했을 때 생각이 난다. 마당 전체에 잔디를 심자는 남편을 설득해서 마당 한편에 밭을 갈고 상추, 고추, 강낭콩, 가지, 토마토 등을 심고 가꾸며 나름대로 재미를 봤다. 호박을 심었을 때는 또 어떤가. 담 밑 구석에 구덩이를 파고 거름과 흙을 섞어 잘 고른 다음 구덩이 속에 씨를 떨어뜨리면 누가 돌봐주지 않아도 호박순이 담장이를 타고 잘도 뻗어 나간다. 호박잎으로는 쌈 싸먹고, 윤기가 반지르르 흐르는 애호박을 따다가 볶아서 칼국수에 고명으로 얹어 먹던 생각을 하면 지금도 입안에 군침이 돈다. 어쩌다가 커다란 호박잎에 가려 늙어버린 호박이, 가을 날씨에 시들거리는 마른 잎 사이에서 삐죽이 고개를 내밀 때, 보너스를 받은 것 같던 기쁨을 농사지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리라.
나는 조금이라도 빈땅이 있으면 화단 귀퉁이 건 마당 가장자리이건 간에 늘 뭔가를 심는다. 그 취미는 농작물을 따서 청정 채소를 음미하고 싶어서라기보다 자라나는 과정을 보는 것이 무척 재미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어디서 살던 조그만 공간만 있으면 방울토마토, 오이, 고추 등을 심었고 공간이 없을 때에는 커다란 화분에라도 심고 가꿨다. 농사짓는 일이 내 적성에 맞는 것 같다고 하면 친구들은 심심풀이로 하는 일을 가지고 농사씩이나 운운한다고 핀잔을 주지만 어쨌거나 나는 심기를 좋아하고 가꾸기를 즐긴다. 모르긴 해도 이 방면으로 나갔다면 삶을 더 다양하고 깊이 있게 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렇기에 돌봐 주는 대로 잘 자라는 고추 모가 고맙고 대견했다.
그러나 어찌 뜻하였으랴! 갑자기 서울에 다녀와야 할 일이 생겨 한 달포 가량 집을 비우게 되었다. 나 혼자 여행할 경우, 외식을 좋아하지 않는 남편을 위해 30여팩 이상 음식을 만들어 냉동고에 넣어두고 떠나야 하는 것이 가장 힘들고 귀찮은 행사였으나 이번에는 남편이 아니라 고추 모가 걱정되었다. 지금 한창, 동글동글 오므리고 있던 하얀 꽃봉오리를 팍팍 터뜨리고 있는데-, 더러는 벌써 모양을 갖춘 작은 고추들을 자잘하게 달고 있어 금년에는 고추 깨나 딸 것 같은 예감이 들었는데-, 내가 떠난 후 누가 2, 3일에 한번씩 물을 줄 것이며 잡풀도 뽑아줄 것인가.
결혼하고 이날 이때까지 꽃이나 나무에는 도통 관심이 없는 남편에게 새삼스럽게 고추 모에 물주고 잡초도 제거해 달라고 부탁한다는 것은 하나마나한 말이다. 그런 것은 왜 심어서 신경 쓰게 만드느냐고 할 것이 뻔하다.
며칠을 고민 고민하다가 떠나기 전날 땅에 물이 흥건하게 고이도록 충분히 주고 미련 없이 떠났다.
여행은 일상의 모든 일들을 잊게 해주어 기분 좋다. 서울 가서는 고추 모 생각은 새까맣게 잊고 지냈다.
6주간의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청소하고 집안 정리하고 시차 적응으로 며칠을 지내다가 어느 날 화단을 돌아보았다. 나무들이야 하루에 두 번 자동으로 나오는 스프링클러로 인해 목마름이 없었겠지만 봄에 사다 심은 일년초나 고추는 귀퉁이에 있어 물이 닿지 않기에 응당 말라죽었으려니 했다. 그런데 그 고추나무가 엉성하기 짝이 없는 팔을 쫙쫙 벌리고 서 있는 것이 아닌가. 가지마다 보기에도 애처로운 가느다란 빨간 고추를 주렁주렁 매달고.
틀림없이 고추는 고추인데 모양새가 이상했다. 잎사귀도 배배 틀려 있었다.
쪽 곧은 고추는 단 한 개도 없이 나선형으로 꼬여져 있었다. 물을 먹지 못해 갈증으로 인해 정상적인 성장을 하지 못한 것이다. 고추의 숨겨진 인고가 느껴지며 갑자기 주체할 수 없는 갈증이 나에게로 엄습해 왔다.
이미 말라죽었으리라 생각해 그동안 아예 잊고 지냈던 고추나무였기에 집에 도착하고 며칠이 지날 때까지 가볼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 고추나무가 역경의 한 생애를 충실히 살아내고 있었음에 심장이 떨리는 환희를, 생명의 신비를 다시 한 번 강하게 체험했다.
다른 집에 심겨졌던들 시원한 물을 듬뿍듬뿍 받아먹으며 주인의 사랑을 받고 자랐을 것을, 나 같이 심어만 놓고 돌보지도 못한 주인 때문에 심한 갈증과 영양실조에 시달려 모두 기형으로 자란 것을 보며 참으로 못할 짓을 한 것 같았다. 물을 주면서 미안해, 미안해 소리가 계속 나왔다.
잡초를 솎아내고 아예 호수를 고추나무 사이에 놓고 물을 흠뻑 주었다. 흙먼지로 하얗게 분장한 이파리들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분무기로 말끔히 닦아주었다. 말려 있던 잎이 손을 펴듯 조금 펴진 듯 싶다. 생기가 도는 것 같았다.
나이 들어가며 모든 살아 있는 것에 대해 관심이 깊어진다. 내가 살아온 세월보다 살아갈 세월이 짧기에 매사에 더 애착이 간다. 내 손을 거쳐 자라나는 식물 한 뿌리라도 소중하고 그것들로 인해 얻어지는 기쁨과 보람이 삶을 넉넉하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시원한 바람과 맑은 햇살이 고추와 어우러져 노닐고 있다. 비록 가늘고 비틀려 볼품 없이 자란 고추지만 완전한 결실, 한 해 농사로 부족함이 없을 정도의 수확을 보며 가슴 뿌듯한 감사가 일렁인다.
하늘이 오늘따라 더욱 짙은 물빛으로 높아 가고 있다.
유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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