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 ‘바퀴’와 함께 인류의 3대 발명품으로 꼽히는 ‘화폐’가 무려 1,000년만에 대변신하고 있다. 5,000년쯤 전(BC 30세기) 금, 은, 곡물 등이 ‘현물 화폐’로 쓰이기 시작한 후 4,000년이 흐른 서기 1,000년경 중국 송나라 때 ‘종이 돈(지폐)’이 나와 인류의 경제생활에 ‘신용’이라는 개념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다시 1000년이 흐른 20세기말에 화폐는 ‘플래스틱 머니(크레딧카드)’ ‘디지털 머니(전자화폐)’의 등장과 함께 또 한 차례 혁명을 시작했다.
화폐는 ‘카드’와 ‘디지털 부호’ 속으로 녹아 들어가 그 영향권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생활은 물론 경제의 흐름마저 바꿔놓고 있다.
◆1000년만의 결제혁명
’결제’는 ‘거래를 맺기 위해 대가를 지불하는 행위’를 말한다. 경제활동을 구성하는 핵심이다. 인류가 무리지어 살면서 최초로 등장한 결제의 매개 수단, 즉 ‘화폐’는 현물이었다. 금, 은 등 귀금속이나 곡물이 그 역할을 했다. 물물교환에서 한 단계 진보한 원시적인 형태의 ‘화폐 경제’가 기원전 3,000년을 전후해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러다 귀한 물건으로 꼽혔던 ‘조개’와 ‘청동’으로 정형화된 화폐를 만들어 쓰기 시작했고 경제규모가 커지면서 주조기술을 이용해 구리와 철로 금속화폐를 대량 생산하기 시작했다.
’지폐’가 등장한 것은 서기 1,000년경 중국 송나라 초엽이다. 종이에 ‘신용’을 불어넣어 결제수단으로 쓰기 시작한,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개념이었다. 상인들이 돈과 교환할 수 있는 전표와 일종의 은행 역할을 하는 전장을 만들어 원시적인 형태의 어음, 수표가 유통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인류가 화폐경제 체제로 결제시스템을 만들기 시작한 지 4000년만에 신개념의 화폐와 함께 ‘신용’과 ‘금융’의 개념이 자리잡게 된 것이다. 두 번째 대변화가 시작되는 데는 다시 1,000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불과 몇 년 전부터 제대로 쓰이기 시작한 ‘디지털 머니’가 혁신의 총화다. 컴퓨터와 고속인터넷망이 대중화되고 반도체기술이 놀라운 속도로 발전하면서 화폐가 ‘디지털 부호’로 변환되기 시작한 것이다.
경제주체들의 모든 신용정보가 기호화돼 IC칩과 거대한 저장탱크(금융회사의 호스트컴퓨터)에 담겨져 결제를 할 때마다 정보를 교환하고, 보이지 않는 장부에서 더하기와 빼기가 이뤄진다.
앞서 한 세대(30년)동안 ‘플래스틱 머니(크레딧카드)’로 ‘결제 혁명’에 적응해 온 ‘문명인’들은 예상치 못한 ‘2차 폭발’의 엄청난 충격에 또 한번 적응해야 한다.
◆경제의 ‘틀’을 바꾼다
소리 없이 찾아온 ‘결제혁명’은 거의 모든 경제활동의 양태를 바꾸고 있다. 대중교통을 이용하거나 샤핑할 때, 하다 못해 책을 사고 호텔을 예약할 때, 세금이나 보험료를 낼 때, 주식을 사고 팔 때도 과거와는 다른 결제방식이 동원된다.
결제시스템의 변화는 산업에도 변화의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통신회사는 모바일 뱅킹을 통해 금융서비스의 영역에 뛰어들었다. 한국의 경우 결제와 관련된 인터넷보안산업의 매출이 지난해 2,500억원에서 올해는 4,000억원 안팎, 5년 뒤에는 2조~3조원으로 뛸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JP모건은 결제와 관련된 전세계 보안산업이 오는 2008년 1,000억달러의 시장을 형성할 것으로 추산했다. 전자화폐를 담은 IC카드의 보급이 본격화할 경우 메모리 반도체 생산업체의 호황이 예상되며, 인터넷 포털업체들은 네트웍형 전자화폐가 범용화 되면 ‘돈방석’에 앉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유통, 금융업은 결제혁명과 같은 속도로 틀을 바꿔나가고 있다. TV와 인터넷몰을 매개로 한 홈샤핑업체들이 불과 몇 년만에 유통의 주류로 부상했다. 인터넷뱅킹은 은행산업에 ‘영업점’만큼이나 중요한 고객서비스 채널로 자리잡았다.
결제시스템의 변화는 ‘제2의 산업혁명’으로 이어지고 있다. 산업구조를 바꾸고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해 경제의 틀을 새로 짜는 거대한 동력장치에 점화가 시작된 것이다.
◆세계의 실험장 ‘한국’
한국만큼 혁신적인 결제수단을 실용화한 나라를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최고수준의 통신, 인터넷인프라와 PC보급률 등 물리적인 기반이 충분한데다 지나치다는 우려가 나올 정도로 크레딧카드 활용도가 높고 금융시스템도 잘 정비돼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인터넷 기반의 다양한 사업들이 빠른 속도로 자리잡고 있다는 강점도 있다.
최근 3-4년 동안 한국은 세계 결제혁명의 실험장으로 부상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난 99년 세계 크레딧카드시장을 양분하고 있는 비자와 매스터는 ‘비자캐시코리아’와 ‘몬덱스코리아’라는 전자화폐회사를 설립했다. SK텔레콤, KTF 등 이동전화회사와 금융회사들이 주주로 함께 참여해 끊임없는 실험을 시도하고 있다.
이들은 콜택시회사와 제휴해 택시요금을 전자화폐로 지불토록 한 데 이어 PC방도 끌어들였고 서울 코엑스센터 등 특정지역과 특정대학에서 ‘디지털머니’를 유통시키는 실험도 했다. 인터넷과 금융회사를 연결해 네트웍 상에서 화폐를 ‘충전’하는 방식도 처음 선보였다. 아직 대중화는 요원하지만 전자화폐회사들은 다른 어떤 나라보다도 ‘한국’의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북유럽과 아시아의 일부 국가들이 정부 주도의 결제시스템 혁신에 제한적으로 나서고 있는 것과 달리 한국은 민간기업이 선도하고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뒤를 받쳐주는 균형 잡힌 형태라는 점도 긍정적이다. 서울에 이어 부산, 광주 등 대도시의 지자체들이 선, 후불 교통카드시스템을 성공적으로 정착시켰고 한국도로공사는 운전자가 직접 도로통행요금을 전자화폐로 지불할 수 있도록 스마트카드 기반의 요금징수시스템 구축을 추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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