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여름. 입추, 말복이 다 지났건만 수은주는 내려갈 줄을 모른다. 어릴적 한국에서는 더운 여름 낮 피서를 위해 냉방이 확실한 은행을 찾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와이너리들이 산재한 캘리포니아에서는 와인 저장동굴을 찾아서 피서를 하는 것도 좋겠다.
평균 화씨 55도를 일정하게 유지하는 와인 케이브에는 최소한의 빛만이 동굴 안을 어두컴컴하게 비춰주고 있어서 으스스한 기분마저 든다. 전구를 달지 않고 촛불로 동굴 안을 밝혀 놓은 곳에서는 흔들리는 촛불이 공포 영화 분위기를 연출하기도 한다.
와인을 만들어서 판매하는데 가장 어려운 점 중 하나는 와인을 커다란 오크 통 속에 담아서 숙성시킨 후 병으로 옮겨 담은 후에 일정한 온도에서 1~2년간 숙성시킨 후 출시해야 한다는 점이다. 소비자들이 구입하자마자 와인을 맛있게 마실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대부분의 와인은 어느 정도 숙성된 후 출시된다.
유명한 포도 생산지들의 특성은 일교차가 크다는 점인데, 그런 곳에서 특히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는 장소를 확보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발명된 것이 스텐레스 스틸로 만들어진 통 속에 백포도주를 숙성시키는 방법인데, 이것은 통 속의 온도를 인위적으로 조절할 수 있기 때문에 오크 통에서 숙성시키는 것보다 보관과 유지가 쉽다. 병으로 옮겨진 와인이 화씨 70도에서 보관될 경우, 55도에서보다 두배 빠르게 조기 숙성해버리기 때문에 와인의 깊은 맛과 향을 충분히 즐기기 어렵게 된다.
이런 이유들로 와이너리들은 지하에 동굴을 파서 와인을 저장하는데, 그 이유는 빛을 차단하고 온도의 변화가 적은 지하 동굴은 와인을 보관하기에 최적의 장소이기 때문이다. 동굴은 에어컨이 필요 없이 일정한 온도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에 전력 소비가 적고, 자연적인 습도가 와인이 증발하는 것을 막기 때문에 와인을 저장하고 숙성시키기에 가장 알맞은 장소로 여겨진다. 적포도주의 경우 자연적으로 습한 동굴 속에서 숙성시킬 때 연간 오크 통 하나당 약 1갤런의 와인이 증발하지만, 지상이나 에어컨으로 온도를 낮춘 곳에서는 약 3갤런이 증발한다.
캘리포니아 나파 밸리에서는 19세기말부터 중국인 노동자들이 망치와 정을 이용해서 와인을 저장하기 위한 동굴을 팠고,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의 와인 저장동굴의 역사는 수백년에 달한다. 21세기에 와서는 로드헤더라고 불리는 기계를 사용해서 좀 더 효율적으로 바위를 쪼개고 동굴을 파지만, 문제는 동굴을 만드는데 들어가는 비용이 만만치 않다는 점이다.
화려한 나파 밸리에서도 가장 호화판 시설과 건물을 자랑하는 ‘오퍼스 원’은 짓는데만 약 2,000만 달러가 들었는데, 와인 저장 동굴이 큰 이유 중 하나였다. 오퍼스 원에서는 1,000개의 오크 통 속에 와인을 채워서 쌓아두지 않고 바닥에 둥근 모양으로 좍 나열하여 숙성시킬 계획을 갖고 동굴을 파던 중 그 주변에 온천 수맥이 지나고 있어서 지하의 온도가 높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동굴 전체에 단열 시스템을 설치하느라 많은 돈이 추가로 들어가게 된 것이었다.
현재 가주에서 와인 케이브를 파려면 최소한 100만 달러가 든다고 한다. 그렇지만 지하에 동굴을 만들면 금싸라기같은 지상의 땅을 포도 재배에만 100% 투자할 수 있다는 이점과 함께, 대개의 와이너리들이 경사진 땅에 많이 위치해 있기 때문에 동굴을 파는 것이 용이하다는 점이 함께 작용하여 와인 저장동굴의 인기는 여전히 높다.
현대에 와서 와이너리의 동굴들은 와인을 저장하는 일 외에 많은 목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나파 밸리의 스택스 립 와인 셀러스(Stags Leap Wine Cellars)에는 푸코(Foucault)의 시계추가 동굴 천장에 매달려 있는데, 시간을 알기 힘든 동굴 속에서 지구의 자전에 따라 움직이는 이 추가 시간이라는 관념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한다.
소노마에 위치한 벤지거(Benziger) 와이너리에서는 계속 팽창하는 사업을 위해 새 건물을 지으려다가 와인 케이브를 만들면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이 동굴은 또한 방문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고 인기를 끌면서 와인 판매를 높이는 역할도 하고 있다. 벤지거의 2만8,000 평방피트 크기의 와인 저장동굴 벽에는, 와이너리에서 고용한 소노마 스테이트 대학 교수이자 화가인 밥 누젠트 교수가 그린 벽화들로 가득하다. 곰, 말, 코요테 등의 동물 그림이 그려진 벽화들을 둘러보며 와인 동굴을 견학하는 방문자들은 가끔 벽화들이 수천년 전에 그려진 것인지를 묻기도 한다. 하지만 벤지거의 동굴은 불과 1년전에 완공된 것이다.
<최선명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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