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몬트가 한인들 <1> 멜로즈~피코구간 건물 30% 한인소유
LA의 상징 ‘그리피스 천문대’에서 태평양까지 LA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70여 마일의 버몬트길. 한인타운의 중심지로, 4·29 폭동을 겪는 역사의 현장으로, 지금은 LA의 대표적인 멜팅팟의 거리로 한인타운의 어제와 오늘을 말해주고 있다.
“버몬트야말로 한인타운의 자존심이지요. 최근 히스패닉이 몰려오면서 버몬트를 떠나는 사람들이 많지만 LA의 상징적인 멜팅팟으로 외국인들의 발길이 늘고있습니다”
버몬트와 8가 인근에서 10년째 업소를 운영해오고 있는 이계순(48)씨는 “이제는 한인 고객보다 히스패닉 고객과 외국인 관광객도 모여들고 있다”며 버몬트의 상권변화를 설명하면서 “한인타운에서 가장 인파가 많이 붐비고 걸어다니면서 샤핑을 할 수 있는 버몬트가를 떠나지 않겠다” 고 말했다.
현재 한인타운내 버몬트가 건물의 31%는 한인들이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 아직도 버몬트는 아직도 한인상가의 거리. 스튜어트 타이틀사 자료에 따르면, 멜로즈와 피코 사이의 버몬트가에 들어선 총 140개 건물 가운데 한인이 43개를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집계됐다.
한인 소유 건물을 용도별로 살펴보면 버몬트와 2가에 위치한 ‘버몬트 노래방’상가를 중심으로 상가가 11개(26%)로 가장 많았고 주차장(8개·19%)이 2위였다.
‘버몬 시보레 뷰익’을 위시한 자동차 관련 시설과 상가·사무실 복합 건물(이상 7개·16%)이 버몬트에 중점적으로 위치하고 있다. 이는 버몬트가 사무실과 상가 등이 함께 모인 중심지임을 보여주는 통계 수치다. 버몬트는‘교통의 요지’로 불리듯 자동차 관련 시설이 밀집돼 있었다.
한인 소유 건물은 중간 건평이 7,270스퀘어피트였으며 5,000∼1만스퀘어피트에 51%가 집중됐다. 가장 큰 한인 소유 건물은 진주숯불갈비가 입주한 상가로 3만6,166 스퀘어피트.
건물을 매도가 기준으로 나눠보면 25만∼50만달러가 13개(30%)로 가장 많고, 100만∼300만달러는 11개(26%), 75만∼100만달러는 7개(16%)였다. 중간 가격은 68만1,500달러이고, 최고가는 1,165만3,100달러였다.
11년전 폭동의 ‘잿더미’ 딛고 ‘들국화’처럼 번영의 꽃 피웠다
다운타운과 한인타운 잇는 우리 삶의 ‘중심 추’
이민의 고단함 딛고 이젠 튼튼한 비즈니스 일궈내
윌셔 코너엔 옛 한인들 버스에 오르던 MTA 정류장
7가 아래엔 다국적 식당·업소 즐비 ‘인종의 용광로’
그러고 보니 잊고 지내던 버몬트의 또 하나의 모습, ‘공공기관의 거리’가 눈 아래로 펼쳐진다. 그릭 디어터에서 맛보는 예술의 향연, LA아동병원을 필두로 늘어선 보건의 파수꾼, LA시티칼리지에서 USC까지 이어지는 교육의 산실…. 우리의 고정관념에 갇혀있던 샛길 버몬트는 어느새 ‘버몬트 커뮤니티’로 확장돼 있었다.
남쪽으로 향하던 발길은 2가에서 멈췄다. 그리고 귓가에는 11년 전 NBC TV를 통해 흘러나오던 “부모님이 하루에 16, 17, 18시간씩 일하며 쌓아온 삶의 터전이 하루아침에 사라졌다”는 한 한인 여성의 절규가 들리는 듯 하다.
그렇다. 버몬트는 잿더미에서 피어난 ‘들국화’다. 부드러운 인상과는 달리 강인한 정신을 소유한 들국화처럼 어떤 고난에도 굴하지 않고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서는 한국인은 폭동의 상처도 견뎌냈다. 그리고 내일을 향해 또 다른 성장의 엔진을 돌리며 오늘도 버몬트를 가꿔가고 있다.
버몬트와 윌셔에 위치한 MTA 정거장에 이르자 20년도 더 된 ‘흑백 필름’ 한 편이 기억 속에서 돌아간다. 남루한 옷차림에 마른 얼굴에서 삶의 고단함이 묻어나는 한인들이 버논과 다운타운의 공장으로 향하는 버스에 오르던 모습.
달랑 단돈 몇 백달러 들고 태평양을 건너왔던 우리들의 아버지가 ‘아메리칸 드림’의 경주를 시작한 출발선이 버몬트였다. 다운타운과 한인타운을 이어주는 관문이었던 버몬트는 교통의 요지이자 우리 삶의 중심 추였다.
지금, 버스에 이민의 고단한 몸을 싣던 승객들은 이제 한인에서 히스패닉 노동자로 바뀌었다. 그 사이 한인의 경제력은 본격적인 자본 축적기에 들어섰고, 버논과 다운타운 공장들의 일부는 한인 소유가 됐다.
7가 아래로 들어서면 버몬트는 완전한 ‘인종의 용광로’가 된다. 한인 식당들을 필두로 멕시코, 태국, 베트남 식당들이 사이좋게 어깨동무를 하고 있다. 이 곳에 서면 한 민족이 우월성을 강조하며 타민족을 학살했던 과거의 광기가 얼마나 부질없는 거였나 하는 자성과 함께 한숨이 절로 나온다.
어둑어둑하던 버몬트가 밤 10시를 넘어서며 다시 한번 반짝 밝아진다. 한 잔 술에 비틀거리며 주린 배를 채우고픈 취객들을 부르는 식당들의 외침이 왁자지껄하다. ‘밤의 버몬트’는 유흥 업종에 점차 주도권을 뺏기는 한인타운의 오늘을 상징하는 또 하나의 얼굴이었다. 그 휘청거림과 함께 짧기만 했던 버몬트의 하루 산책도 끝났다.
버몬트서 33년 그레이스 이 씨
“난 영원한 버몬트 보안관”
“그레이스 이씨가 환갑이 넘었대!” 이씨의 나이는 개인을 넘어서 한인 모두에게 특별한 의미다. 그는 33년간 버몬트 한 곳만을 지켜온 산 증인이기 때문이다.
71년부터 지금까지, 한인들에게 기억되는 이씨는 젊고 능력 있는 세일즈우먼이다. 수년간 그랜드 매스터에 올라 활짝 웃으며 사진세례를 받았던 그 열혈 여성의 어깨에도 버몬트와 함께 세월의 더께가 내린 것이다.
‘버몬트 보안관’ 이씨는 “한인에게 버몬트는 제2의 고향으로 올림픽과 더불어 정신적 지주 같은 길”이라고 말한다. 이민 초기 그리피스 천문대에 올라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던 이민자라면 그리피스 팍부터 타운을 관통하며 남쪽으로 뻗어 가는 이 대로를 누구나 기억한다는 게 이씨의 설명이다.
또 버몬트는 101, 10번 프리웨이와 연결되면서 LA와 타 도시, 이민자와 주류사회를 잇는 다리 역할을 해 “버먼트는 각지와 서울을 연결하는 사통팔달인 종로와 비슷하다”고 말했다.
이씨에게도 버몬트는 꿈을 이루어준 곳이다. 29세에 처음 미국 와 ‘뭐 해먹고 사나’ 걱정하며 버몬트를 지나가는데 환히 불 밝힌 ‘미드웨이 포드’가 그렇게 부러워 보여 ‘저기서 청소라도 했으면’하고 바랐단다. 얼마 안가 정말 그 곳에서 일하게 된 이씨는 청춘 바쳤고, 13년 간 그랜드 매스터에 올라 “그레이스 이 없이는 차 못 산다”는 자동차 업계의 신화를 남겼다.
70년대 초 버몬트에는 한인타운은 커녕 한인 운영 비즈니스도 없었고, 한인들은 주로 청소, 페인팅 등에 종사했다고 한다. 인종도 백인 위주여서 히스패닉이 70%인 지금과는 딴판이었다. 그 때를 회고하면 지금의 한인타운은 낯설 정도라고 하니, 버몬트 변천사는 곧 한인타운 발전사에 다름 아니다.
<김수현 기자>
<글 김호성·양지웅 기자, 사진 홍재철 기자>
<김호성·이의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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