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주은 할아버지는 1879년 5월 경기도 개성에서 출생하여 1903년 3월에 두 번째 하와이이민선을 탄 분이다. 오하우 섬 사탕수수밭에서 2년 6개월 동안 외국인 출신 백인 십장들의 혹사를 당하면서 하루에 10시간 일하고 69센트를 받았다. 이때의 두려움 때문일까. 25년 전 양할아버지는 나의 선배 마켓에 들리시어 백인들이 앞에 있으면 저쪽으로 돌아 나오곤 했다. 지긋지긋한 고용기한이 끝나자 고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안창호라는 인물을 만나보고자 샌프란시스코로 건너왔다.
그보다 반년 연배인 안창호는 공부하러 미국에 왔다가 더 중요한 것이 한인들 계몽임을 알게되었다. 동포가 거주하는 아파트를 찾아가 유리창을 닦아주고 문 앞에 화초를 사다주고 집안에 냄새를 없애려 주방과 변소를 청소해주고 헝겊과 철사를 사다 커튼을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제발 큰소리로 떠들지 말고 싸우지 말라고 일렀다. 상투를 잡고 싸우던 인삼장수들에게는 행상구역을 공평하게 정하고 가격을 협정하여 떨어트리는 일이 없도록 했다. 1970년대 가발 판매 시대에도 도산 같은 지도자가 있었더라면 동족끼리의 가격 덤핑을 막았을 것이며 1977년 덴버에서 한인들이 아파트에서 김치냄새를 풍겨 미국법의 심판을 받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튼 20명쯤 살던 샌프란시스코 한인들은 깨끗한 주거지와 때묻지 않은 의관을 갖추니 생각도 달라지는 것이었다. 면도하고 나지막히 말하고 이웃에 냄새가 새어나가지 않게 노력하니 미국인들도 당신들에게 훌륭한 지도자가 나타난 게 분명하다고 지적했다. 도산을 만난 양 옹은 1906년 상항 한인연합감리교회 창립신도가 되고 대한인 국민회가 샌프란시스코에 창설되자 그 목적인 화목과 단결을 실천하면서 도산을 도와 흥사단을 만들어 평생을 그 정신으로 살았다.
그는 마켓 스트릿에서 양창관 커피샵을 40년 동안이나 운영했다. 안창호, 이승만, 장인환 등은 거추장스런 권위가 붙지 않는 그의 무료식객들이었다. 자연스럽게 그도 스티븐슨 저격에 가담된다. 돈은 모아지기가 무섭게 독립운동 하던 이들에게 보내졌다. 일제의 조국말살 정책이 심각해지자 교포들과 힘을 합쳐 군자금을 마련하여 상해임시정부에 송부, 임정 대한민국 18년에는 각료 연서로 된 감사 편지도 보내왔다. 조국이 독립된 뒤에는 더 바빠졌다. 밀려오는 가난한 유학생, 군인들, 정부 관료들까지 숙식을 무료로 제공해 주었다.
앞에서 돋보이는 이들 뒤에는 챙겨주던 그가 숨어 있었다. 그럼에도 74년 박정희 정부에 와서야 국민훈장 모란장을 주었다. 초라한 예우일진데 노안에 눈물을 글썽이면서 “나 같은 사람에게까지 훈장을 주느냐”고 했다.
진명 고녀(1회)를 나온 이제현 씨와 1913년에 결혼했으나 부인은 1958년 심장병으로 사별, 혼자 살면서 월 235달러 받는 연금으로 생활했다. “교회 헌금, 흥사단 회비, 국민회의 회비 내고 신문 값 주고 부족하면 부족한 데로 살지.”
74년, 자기 주머니들을 털어 한시간 짜리 한국어 방송을 하던 이들은 지금도 “오래 사니 애국가도 듣게 되네”라며 찾아와서 꼭꼭 접은 10달러 지폐를 주고 가던 양할아버지를 기억한다. 79년 한국 미술 5,000년 전이 동양박물관에서 개막되었을 때 매일 찾아가 꼼꼼히 감상하기도 했다. 100세가 넘어서도 아파트에 혼자 살면서 빨래하고 식사준비하고 매일 4~5블럭을 걸었다. 물론 술 담배 놀음엔 손댄 일이 없다.
104세가 된 4월부터 호홉기 질환과 기억력이 감퇴되어 양노 병원에 입원했다. 따님 릴리안 여사는 병실 입구에 한글로 ‘방문금지’ 팻말을 붙이게 했다. 어렵게 찾아간 동포들에게 “한국은, 그리고 동포들은 어떻게 지내느냐”고 걱정을 하셨다. 그 해 8월 30일 흑인과 중국노인과 함께 입원한 오줌냄새가 진동하는 방에서 아무도 지켜보는 이 없이 영민 하셨다.
75년을 다닌 상항 한인감리교회 송정률 목사의 집례로 가족장이 엄수되고 사이프러스 론 묘소 아내 옆에 눕게되었다. 평생 동족을 사랑하신 분을 보내며 조가를 부르던 이도 울었고 250명 한인들은 울음바다였다.
각종 동포 행사에 불려나가 그가 해야 할 일은 만세삼창이었다. 카랑카랑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 그는 월드컵의 온 국민 함성 “대한민국”을 예견하셨으리라. 얼굴도 머리도 하얀, 그의 호는 백운(白雲), 정말 흰 구름처럼 깨끗하게 사셨다. 살아생전 90세가 되신 이후 매년 그분의 생신은 이곳 한인들의 축제였다. 5월 25일을 샌프란시스코 한인 축일로 되살렸으면 좋겠다. 나라와 동포는 사랑의 제일 대상이요 개인의 생활은 맨 마지막에 둔 그분의 삶을 우리들의 표상으로 삼았으면 한다.
이재상/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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