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도적 같이 생긴 남자가 실크 블라우스를 매만지는…
오후 내내 북적대던 매장이 다섯 시가 넘자 한산해졌다. 선미는 카운터 뒤의 의자에 주저앉아 주먹으로 종아리를 툭툭 쳤다. 말이 동업이지 장사에 통 관심이 없는 정섭이 엄마는 오늘도 머리가 아프다는 핑계로 나타나지 않아 카운터 보아가며 뒤죽박죽된 옷들까지 정리해 거느라 정신없는 하루였다. 진열장 위의 바구니 속에 엉켜 있는 오 불 짜리 목걸이들도 풀어서 다시 진열해야 할텐데 쥴리는 화장실엘 갔는지 보이질 않았다. 늦게라도 정섭이 엄마가 나오면 봄 학기가 끝나 집으로 올 윤수를 위해 과일을 좀 사서 집에 일찍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하는데 낯익은 얼굴이 유리문을 밀고 들어왔다.
가끔씩 들러 흘끔 흘끔 눈치를 보며 여자용품을 사가는 노인이었다. 아내 옷을 사겠다면서 커다란 드레스를 자기 몸에 슬쩍 대보는 거며 손톱을 길다랗게 기른 게 어딘지 수상쩍은 백인 할아버지인데 그는 옆에서 도와주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가게의 주 품목이 여자 옷과 독특한 장신구들이라 그런지 크로스 드레서라고 불리는 남자들을 심심치않게 보게 된다. 그들은 게이들과 달라서 성적파트너로 동성을 택하는 남자들이 아니라 가끔 여자 옷을 입고 싶은 충동에 휩싸이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물론 그들 중에는 동성연애자들도 있지만 여자 친구나 아내가 있는 남자들도 종종 있다.
처음에 그런 사람들이 가게에 들어 왔을 때 선미는 지옥에 떨어질 것들이라는 생각에 쌀쌀맞게 대했었다. 그런데 차츰 단골이 되기도 하고 또 많이 봐서 이력이 난 탓인지 요즈음은 농담을 주고받기도 한다. 구척 장신에 산도적같이 생긴 남자가 실크 블라우스를 매만지는 모습을 보면 어이가 없지만 야리야리하게 생긴 예쁘장한 청년이 수줍게 장신구를 고를 때는 슬쩍 그에게 어울릴 것들을 권하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개인적인 질문을 할 기회도 생겨 혹시 아픈 곳을 건드리는 것이나 아닐까 우려하면서 조심스럽게 물어보면 열이면 열, 다 반색을 하며 속마음을 열어 보였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치는 것처럼 그들도 어딘가에 털어놓을 데가 있어 좋은 모양이었다. 남편은 그러는 그녀를 못마땅해했다.
“당신, 인간 같지도 않은 놈들한테 왜 그렇게 잘 해줘? 혹시 그쪽으로 관심있는 거 아냐?”
“얘기를 들어보면 다 나름대로 사연이 있고 아픔도 있더라구요. 아까 왔던 애는 글쎄 ....”
“사연은 무슨 빌어먹을 사연! 그런 놈들 얘기 들어봐야 귀만 더러워지지”
남편은 질색을 하며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크로스 드레서가 동성연애자와 다르다는 사실을 안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어느 날 저녁, 대머리에 길다란 꽁지머리를 한 사십대의 건장한 남자가 머리를 가릴 수 있는 모자를 고른다기에 운동모자 진열대쪽으로 안내를 했다. 적당히 때가 묻은 블루진 바지에 엘비스 프레슬리 사진이 박힌 티셔츠를 입고 성큼성큼 걷던 그가 운동 모자보다 그 옆의 빤짝이와 깃털로 장식된 재클린 케네디 모자에 관심을 보였을 때 그녀는 못 본 척 돌아섰다. 그날 뉴욕 양키 팀의 로고가 박힌 모자를 샀던 그는 다음 날 아침 일찍 와서 쭈뼛거리며 그 화려한 모자를 사 갔다.
그는 그 후로도 가끔 들러 마누라 줄 선물이라며 귀걸이나 싸구려 반지 따위를 사가더니 어느 날 완전히 여장을 하고 나타났다. 무릎에서 조금 내려간 남색 물방울무늬 드레스에 베이지색 재킷을 걸치고 족히 삼 인치는 됨직한 하이힐을 또각거리며 들어서는 그의 얼굴은 학예회때 무대 위에 올라선 유치원 아동처럼 자랑스런 표정이었다.
“나 어때요?”
문을 꽉 채울 만큼 건장한 체구에서 애써 꾸민 여자 음성이 흘러나오는데 우습기보다 오히려 애처러웠다. 화장이랍시고 떡칠을 한 파운데이션 밑으로 거뭇거뭇한 수염이 자라나고 있었고 송충이 같은 눈썹 밑은 갈색과 초록색 눈 화장으로 범벅이 되어 올빼미 같았다. 파란 눈동자와 좁다랗게 날이 선 콧날만은 웬만한 여자의 것보다 아름다웠다.
“옷 색깔이 매칭이 됐나요? 화장은 어때요?”
칭찬을 기다리고 서 있는 그에게 해줄 말이 마땅치 않아 그녀는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글쎄, 눈 화장을 좀 고쳤으면 좋겠네요. 색깔을 좀 옅게 해야 당신의 아름다운 눈이 돋보이겠어요”
그 말에 그는 여자들끼리인 것처럼 선미의 손등을 살짝 치며 기뻐했다.
“그렇지 않아도 어려서부터 눈이 예쁘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어요.”
그렇다면 남자아이들에게 예쁘다느니, 여자아이들에게 씩씩하다느니 하는 얘기를 함부로 해선 안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선미는 그에게 아내는 물론, 장성한 자식이 둘이나 있다는 소리를 듣고 놀랐다.
“부인도 당신이 이러구 다니는걸 아나요?”
“아내는 간호사라 오후 세시에 출근했다가 자정이 넘어 돌아오니까 모를 겁니다.”
“아니, 몇 십 년을 같이 살면서 어떻게 그걸 모를 수가 있어요?”
믿을 수가 없어 다그쳐 묻자 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눈치를 채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상관없어요. 어차피 한 집에서 산다는 것뿐 남처럼 살고 있으니까요”
“그게 무슨 뜻이죠?”
“아내가 둘째 아이를 낳고 나서 일 년쯤 아팠는데 그 이후로 저를 곁에도 못 오게 했어요. 처음에는 이해해보려고 했지만 자존심도 상하고 화도 나고, 그래서 원수갚는다는 기분으로 여장을 하기 시작했지요”
어느새 그의 어깨에서 힘이 빠지고 목소리도 소프라노에서 베이스로 내려갔다.
“그럼 몇 년 동안이나....?”
“몇 년이 뭡니까? 그 녀석이 지금 스무 두 살이니까 이십 년이 넘도록 한 침대에서 자면서 서로 손끝도 안 만지지요. 거절당할 때마다 자존심 상하는 거 여자들은 이해 못 할 거예요”
그는 눈을 내리깔고 손바닥 크기의 작고 납작한 핸드백을 만지작거렸다.
“그렇지만 이해가 안 되네요. 당신은 그렇다 치고 암만 아팠다고 해도 그렇지 이십 년 넘게 그런 식으로 살았다면 당신 부인은 석녀인가요? 가끔은 욕망이 생기기도 했을텐데.”
그는 잠시 가만히 있더니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작은 소리로 대꾸를 했다.
“실은 그렇게 이 삼 년을 지내고 나니까 내 몸이 말을 안 듣더라구요. 그러니 창피하기도 하고 겁도 나고.... 미칠 것 같았어요”
잠시 말을 끊었던 그가 고개를 들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집에 아무도 없을 때 아내의 옷을 입으니까 마음이 편안해지더군요. 그래서 미칠 것 같을 때마다 몰래 아내의 옷을 꺼내 입고 집안을 왔다갔다 걸어다녔죠. 그러다 작년부터는 화장도 하기 시작하고....”
“그럴 때 기분이 어때요? 누가 볼까 겁이 난다거나 그렇진 않습니까?”
“처음에는 겁이 났지요. 그런데.... 그게 날 흥분시키더군요. 성적흥분하고 비슷하다고나 할까. 요즈음은 일주일쯤 그냥 지내면 못 견디겠어요”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에요?”
“이제는 바깥으로도 나갈 생각이에요. 지난 목요일 밤에 이렇게 차리고 주유소에도 가고 가게에 가서 우유도 샀는데 아무도 내가 남자인걸 모르는 것 같더라구요. 그래서 오늘 용기를 내서 여기 온 거예요”
아내에게 계속 비밀을 지킬 생각인가, 아니면 털어놓고 이혼이라도 할 생각인가를 물은 건데 그는 다시 흥분해서 목소리를 높이며 떠들어댔다. 도대체 이 남자의 부인은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다. 혹시 그 여자는 남편 몰래 남장을 하고 다니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픽 웃음이 났다. 그 여자도 보통 사람은 아니지 싶었다.
퀸싸이즈의 까만 스타킹을 두 켤레 사들고 백인 노인이 나간 지 얼마 안 되어 정섭이 엄마가 얼굴이 벌개서 들어왔다.
“왜 그래요? 집에 무슨 일 있어요?”
묻는 말에 대꾸는 않고 그녀는 들고 있던 커다란 가방을 카운터 뒤로 던져 넣었다.
“내가 미쳐, 미친다구”
“왜 그러냐니까? 혈압도 높은 사람이 어쩌려구 그렇게 흥분을 하고 그래요?”
정섭이 엄마는 옆에 있는 박스 위에 털썩 주저앉아 얼굴을 두 손으로 쓸어 내렸다.
“아, 그 기집애가 애를 뱃다잖아”
“누가?”
“누군 누구겠어? 정섭이랑 노상 붙어다니던 그 화냥년이지”
남의 집 딸더러 못할 소리가 없네 하려다 축 쳐진 그녀의 표정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하긴 내 자식이 그 모양인데 누굴 탓하겠어? 그런데 그년이 애를 그냥 낳겠다니 이 노릇을 어쩌면 좋아?”
“아직 공부하는 학생이 애를 낳아서 어쩌려구?”
“낸들 알아? 말로는 기독교적 양심상 살인을 할 수가 없다는데 기독교적 양심 좋아하네. 기독교적 양심으로 처녀가 그 짓은 어찌 했누? 윤수는 아직 여자친구도 없죠? 윤수엄만 좋겠수, 공부 잘 하고 말썽 안 부리는 아들을 둬서”
“자식자랑 함부로 하는 게 아니랍디다. 더 두고 봐야지 뭐”
대답은 그렇게 하면서도 선미는 윤수가 자랑스러워 가슴이 뿌듯했다.
아직 제철이 아니어선지 야채가게 앞에 쌓여있는 수박은 5불 99전의 가격표를 달고 있었다. 그녀는 어린아이 엉덩짝에 주사놓는 간호사마냥 수박을 찰싹 찰싹 두드려보고 탱탱 소리가 나는 것으로 골라 카트에 싣고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윤수가 좋아하는 체리는 한 파운드에 4불 99전이었다. 한 파운드래야 몇 개 되지도 않을텐데 싶으니 살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녀는 옆에 있는 포도를 잠시 바라보다 체리를 살이 단단한 놈으로 골라 하나씩 봉지에 넣기 시작했다. 체리를 끊임없이 입 속으로 넣기만 하고 씨를 뱉지 않아서 저 애가 씨까지 다 삼킨 건가 하고 쳐다보면 다람쥐처럼 뺨 양쪽에 잔뜩 밀어 넣었던 씨를 하나씩 뱉어내며 그 숫자를 세던 윤수가 생각나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제법 묵직해진 봉투를 들었다 놓으며 더 넣을까 말까 망설이는데 누가 팔을 슬쩍 건드려 돌아보니 피터엄마였다. 가끔 피터네 집에 놀러 간 윤수를 데리러 가서 보면 짧은 금발머리를 나풀거리며 상큼하게 웃어 세탁기 광고에 나오면 딱 어울릴 것 같은 여자다. 오늘은 화장기가 없어서 그런지 풀기 빠진 세탁물처럼 지쳐 보였다.
“하이, 낸시. 오랜만이에요. 그 동안 어떻게 지냈어요?”
의례적인 인사말에 “화인”하고 대답하는 대신 입술을 깨문 채 고개만 끄덕이던 낸시가 울기 직전의 어린아이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물었다.
“윤수는 학교 잘 다니지요?”
늘 생글거리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지니까 양쪽 입술 끝이 쳐져 나이가 십 년은 더 들어 보였다.
“방학이라고 내일 집에 온다네요. 그런데 무슨 일 ... 있어요?” 어두운 감정은 전염이 잘 되는지 선미의 목소리도 낮아졌다.
“저어... 나랑 얘기 좀 할래요? 댁으로 찾아갈게요.”
이삼일 내에 들르겠다는 말을 하고 급히 돌아서 가는 낸시의 뒷모습이 허둥대듯 불규칙하게 흔들렸다. 위로 착 올라붙은 동그란 엉덩이를 흔들며 경쾌하게 걷던 걸음걸이가 아니었다. 잠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는데 까닭없이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불안은 빠른 속도로 몰려와 순식간에 그녀를 감쌌다.
“하이, 맘”
문을 열어주는 선미에게 빨래바구니부터 쑥 내밀며 윤수가 씽긋 웃었다. 커다란 쑥색 플라스틱 바구니는 빨래감으로 수북했다. 윤수는 바구니를 받아드는 선미의 어깨를 가볍게 안았다.
“아이구 우리 아들, 오랜만이다. 길 막히지 않던? 배고프지? 엄마가 상 다 봐놨다”
그녀는 바구니를 내려놓고 그의 등을 두어 번 두드렸다. 겨울방학에 왔을 때 노랗게 물들였던 머리카락이 거의 다 잘려 나가 검은 머리카락 위에 노란 꽃가루를 뿌려놓은 것 같았다.
“점심 먹자마자 떠났으니까 이제 세 시간밖에 안 지났는데 벌써 배가 고프네.”
윤수는 빨래 바구니를 집어들고 천장에서 드리워진 전등을 피해 고개를 숙이며 부엌 쪽으로 걸어갔다. 카키색 반바지 밑으로 쭉 곧은 길다란 다리가 보기 좋았다.
선미는 찌개를 데우기 위해 레인지의 불을 켜고 조금 전에 만들어 아직 따뜻한 잡채를 접시에 담아 상위에 올려놓았다. 빨래바구니를 부엌 옆의 다용도실에 들여놓고 나와 식탁에 앉는 윤수의 눈이 둥그래졌다.
“와아, 잡채다.”
“너 밥은 제대로 해 먹는 거니?”
그녀는 찌개그릇을 상위에 올려놓은 후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우리 넷이 돌아가면서 주말에 한번씩 요리를 해요”
“그럼 주중에는 뭘 먹구?”
“걱정 마세요, 이렇게 살도 안 빠지고 잘 지내니까. 오히려 다이어트를 해야할 지경인 걸요. 그런데 아빤?”
“안 계셔. 회의 때문에 루이빌에 가셨다. 며칠 있다 오실 거야”
물컵을 들던 손이 잠시 멈추는가 싶더니 윤수는 웃는 얼굴을 선미에게 돌렸다.
“이번에 일주일 있는 동안 엄마한테 요리강습을 좀 받아야겠어요. 지난번에 떡볶이를 만들어주니까 녀석들이 맛있다고 난리더라구요”
“그래, 불고기나 닭찜같은 건 생각보다 쉽단다. 생각난 김에 이따 나가서 장 좀 봐오자”
“밥 먹고 피터네 집에 갔다 올까 하는데요.”
닭찜 그릇을 윤수 앞으로 옮겨 놓아주며 그녀는 힐끗 윤수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렇지 않아도 어제 야채가게에서 피터 엄마 만났는데 얼굴이 어둡더라. 그 녀석이 고등학교 다닐 때 일주일인가 정학맞지 않았었니? 왜 그랬지?”
“나도 잘은 모르지만 그 학교 규칙이 너무 엄했으니까 보나마나 별거 아닌 일로 그랬을 거예요. 엄마도 피터 여러 번 보셨잖아요. 좋은 애예요.”
“글쎄나 말이다. 얼마 전에도 백화점에서 만났는데 깍듯이 인사를 하더구나. 커다란 눈을 깜빡 깜빡 하는데 여전히 계집애같이 예쁘더라. 너무 늦게 들어오지 않도록 해. 너 그 집에 가는 거 아빠가 안 좋아하시잖니.”
윤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윤수가 나간 후 선미는 드라이어에서 갓 꺼내어 따뜻한 빨래를 바구니에 담아들고 TV앞에 앉아 아까 보다만 비디오테이프를 밀어 넣었다.
비디오에서는 치렁치렁한 옷을 입은 대신들이 머리를 조아리며 일제히 망극하옵니다를 외치고 있었다. 그녀는 이따금씩 화면에 눈을 주며 바구니에서 속옷과 티셔츠들을 하나씩 꺼내어 개키기 시작했다. 오로지 아들을 생산하는 것이 삶의 목적인 궁중의 여인이 여왕벌과 다를 게 하나도 없다는 생각을 하던 그녀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손끝에 레이스가 달린 하얀 실크 팬티가 잡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녀석이 어느새 여자친구가 생겨서 버젓이 아파트까지 끌어들인단 말인가?
두어 달 전에 장조림을 만들어서 찾아갔을 때 같이 앉아서 TV를 보던 검은 눈의 인도 아이는 그냥 학교친구라고 했는데 그럼 이것이 그 여학생의 것인가? 윤수에게 다그쳐 물어야 할지, 그냥 모르는 척 해야할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자식이라군 하지만 스무 살이 넘은 아이의 사생활을 너무 간섭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 또 솔직히 물어볼 용기도 없어 그녀는 나머지 옷들을 다 개켜 바구니 속에 차곡차곡 집어넣으며 팬티를 양말들 사이에 찔러 넣었다.
윤수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여자친구는커녕 데이트 한번 제대로 해본 적이 없었다. 정섭이 엄마의 불평대로 지 애비를 닮아 공부는 안하고 어려서부터 기집애 꽁무니만 쫓아 다니는 정섭이와 달리 윤수는 남녀 가릴 것 없이 여럿이 어울려 주말에 가끔 놀기는 해도 마음을 주고받는 특정한 아이는 없는 것 같았다. 어려서부터 숫기가 없고 마음이 여려, 싸워서 이기기보다는 미리 양보하기 일쑤였다. 남편은 사내녀석이 그래서야 험한 세상 어떻게 살거냐며 못 마땅해 했는데 애를 치마폭에 싸고돌아 계집애같이 만들어버렸다고 선미까지 나무라곤 했다. 바깥에서 놀다 풀꽃을 들고 들어와 엄마에게 내미는 아이에게서 꽃을 빼앗아 쓰레기통에 던져 넣은 적도 있었다.
꼬마 신사라는 소리를 듣던 아이가 어느새 어른들의 세계로 뛰어 들었다는 게 대견하다기보다 안쓰러운 생각이 들었다. 인생에는 단맛만 있는 게 아니라 쓴맛도 있다는 걸 알아가면서 겪을 고통이 안타까웠다. 그러고 보니 아까 본 윤수의 눈빛이 전처럼 단순하지 만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빨래를 다 개킬 때까지 궁중의 여인들과 대신들은 여전히 아들을 생산해야한다고 쑥덕거리고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정치가들이 나라 걱정은 안 하고 권력 쥘 생각만 하고 있으니 한심하고 짜증이 나 꺼버릴까 하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선미는 TV의 소리를 죽였다.
“이 사람들 정말 회의를 민주적으로 하네”
미국 장로교단 총회에 평신도 대표로 참석하느라 이틀 전부터 켄터키주의 루이빌에 가 있는 남편이 잘 있었느냐는 말도 없이 다짜고짜 감탄조로 말했다.
“재미있어요?”
“재미는? 아침부터 밤까지 식사시간만 빼고 내내 회의를 하는데 하루에 처리해야 할 안건이 백 개도 넘어. 앞으로 닷새를 더 있어야 하니 생각을 해봐, 얼마나 많은 안건을 처리해야 하는지”
호기심이 많아 환갑이 되 오는 나이에도 여전히 새로운 것을 배우기 좋아하는 그답게 목소리가 흥분에 차 있었다.
“무슨 안건이 그렇게나 많아요?”
“별 시시한 게 다 있어. 예를 들면, 신학교를 안 나와도 목사안수를 주게 하자든가, 민주주의 원칙에 의해 20대와 30대에서도 장로를 뽑자든가. 그런데 제일 중요한 안건은 모레 저녁에 다루어질 거야”
“그게 뭔데요?”
남편의 흥분이 전염되었는지 그녀도 부쩍 호기심이 생겼다.
“우리 장로교단에서 게이나 레스비안에게 목사 안수를 줄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문제지”
“뭐예요? 아니, 그게 어떻게 안건이 되요? 당연히 안 되는 거지”
그녀의 말에 픽 웃는 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넘어왔다.
“그런데 그게 그렇지가 않아. 의외로 안수를 주자는 사람들이 많다구. 아까 나랑 같은 테이블에서 점심을 먹은 사람은 자기 여동생이 레스비안이래. 그런 걸 내놓고 얘기하니 난 참 미국사람들 알다가도 모르겠어. 나 같으면 창피해서 얼굴도 못 들텐데 말이야. 그러면서 레스비안이 목사가 되면 많은 레스비안들이 그 교회엘 갈테니까 선교차원에서도 그게 좋지 않느냐는데 어이가 없어서 말이 안 나오더라니까. 그런가하면 로비하러 다니는 놈들도 있고, 별 놈들이 다 있어”
“그러구보니 생각이 나네요. 작년에도 그런 문제가 신문에 크게 나지 않았었어요?”
“응, 작년에는 부결이 됐었는데 이번에 또 들고 나온 거야.”
“그렇다면 가결될 때까지 그 문제를 매년 들고 나오겠다는거 아니에요?”
리모트 콘트롤로 TV를 끄며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
“물론이지, 부결된 걸 똑같이 들고나올 수는 없으니까 조금 바꿔서 갖고 나오겠지”
남편은 너무 피곤해서 일찍 자야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수화기를 내려놓은 후에야 윤수가 집에 왔다는 말을 하지 않은 생각이 났다.
오랜만에 가게에 일찍 나온 정섭이 엄마 덕에 여섯 시쯤 퇴근했는데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친구와 저녁을 먹고 오겠다는 윤수의 쪽지만 상위에 덩그마니 놓여 있었다. 선미는 찬밥에 더운물을 부어 냉장고에 있던 밑반찬으로 대강 저녁을 먹은 후, 저녁노을로 붉게 물든 창 밖을 내다보며 천천히 설거지를 했다. 마음이 허전하거나 불안할 때 설거지를 하는 것은 그녀의 오래된 습관이다. 단조롭게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건너 집 뜰의 우람한 나무들을 바라보노라면 마음이 건조기에서 갓 꺼낸 흰 타월처럼 보송보송해지곤 한다.
몇 안 되는 그릇을 씻은 후 녹차를 한잔 마시려고 주전자에 물을 받는데 끼익 자동차 급정거하는 소리가 들렸다. 얼른 내다본 창 밖으로 은회색 미니 밴 앞에 조그만 다람쥐 한 마리가 앉아 고개를 요리조리 돌리다 저쪽 집 잔디밭으로 쪼르르 달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가끔씩 보게 되는 프리웨이 위에 널브러진 짐승들의 형상이 떠올라 부르르 몸이 떨렸다.
낸시는 아홉 시가 조금 넘어서 왔다. 방금 구웠다는 초콜렛칩 쿠키 한 접시를 두 손으로 받쳐들고 들어서는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어두웠다. 연하게 끓인 커피가 식어가도록 놔둔 채 다리를 꼭 붙이고 앉아 무릎 위에 올려놓은 냅킨 위의 쿠키만 부숴뜨리는 그녀를 보며 선미는 말없이 커피를 마셨다. 가끔씩 시선이 마주칠 때면 그냥 미소만 띄었다. 영어가 부담스러워 인사말 외에 깊은 대화를 해본 적이 없는 사이였기 때문에 무슨 말을 꺼내야 좋을지 모르기도 했지만 날씨 얘기나 정치 얘기를 꺼낼 수는 없는 분위기였다.
“저어, 혹시 윤수한테서 우리 피터 얘기 못 들으셨어요?”
“무슨 얘기요?”
목소리가 매끈하게 나오지 않아 선미는 기침을 두어 번 했다.
“..... 윤수도 알 텐데...... 피터가 게이라는군요.”
울듯한 표정으로 말을 하는 낸시의 손에는 잘게 찢은 종이 냅킨이 한 웅큼 들어 있었다.
“아니요, 그런 얘기 안 하던데요”
“저도 얼마 전에 알았어요. 침대 밑에 게이 잡지가 있길레 물어봤더니 그렇다더군요.”
일단 말문이 열리자 속사포같이 말이 쏟아져 나왔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난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요. 내가 자길 어떻게 키웠는데... 참, 피터가 입양아라는 사실은 아시죠? 모르셨어요? 자궁 절제 수술을 했기 때문에 난 아이를 낳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태어난 지 한달 된 피터를 입양했죠. 그래도 난 그 앨 내 목숨같이 사랑했어요. 목에 걸릴까봐 빵의 딱딱한 부분은 다 잘라내고 말랑말랑한 속만 먹일 정도였으니까요. 혹시 내가 그 앨 너무 싸서 키워 이런 일이 생긴 게 아닌가 싶어 요즈음은 밤에 일어나 앉아서 후회하느라 잠을 못 자요.”
금새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 같던 그의 눈이 커지며 입가가 씰그러 들었다.
“그것뿐이 아니에요. 그 앤 이제 자기 생을 망치려하고 있어요. 학교도 그만 두고 쇼를 하러 다니겠다는군요. 쇼가 뭔지 모르시죠? 술집에서 여자 옷을 입고 난잡한 춤을 추면서 손님들이 던져주는 돈을 버는 거예요. 누가 가장 여자같은 모습으로 섹시하게 춤을 추는 가가 그런 아이들의 최대 관심사죠. 피터는 요즈음 오로지 화려한 여자 옷을 사들이기 위해 피자가게에서 파트타임으로 일을 해요.......”
성냥불이 사그라들듯 낸시의 음성이 잦아들었다. 그녀는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고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잠시 후 그녀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누구에게도 아직 이 얘기를 못 했어요. 아시잖아요. 사람들이 은근히 남의 불행을 즐긴다는 걸. 걱정해준답시고 찾아와서 호기심을 번득이며 이것저것 물어댈 것을 생각하면 참을 수가 없어요. 허지만 누구에겐가 말을 안 하면 미쳐버릴 것 같았어요. 엊그제 당신을 본 순간 당신은 내 이야기를 잘 들어줄 것 같은 느낌이 들더군요.”
왜요? 왜 그런 느낌이 들었나요? 라는 질문이 입안에서 뱅뱅 돌았다.
“부탁이 있어요. 우리 피터가 쇼를 한다는 술집으로 같이 가주지 않을래요? 그 녀석이 무슨 짓을 하는지 내 눈으로 봐야 이해를 하든지, 아니면 그 짓을 못 하게 무슨 대책을 세우든지 할텐데 도저히 혼자 갈 자신이 없군요.”
당신 마음을 이해는 하지만 그런 곳에 같이 가는 건 못 하겠노라고 말을 하고 싶은 생각이 치밀어 오르는데 낸시의 눈빛을 보자 차마 말이 안 나왔다. 그리고 왠지 거기엘 꼭 가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생각해볼게요 라는 말로 얼버무리며 낸시를 보내놓고 문을 닫는데 옷을 입은 채 물에 빠졌다 나온 사람처럼 오싹 한기가 들었다.
열한 시가 다 되어 전화를 한 남편의 음성은 낮으면서도 뾰족해서 심사가 편치 않음을 대번에 알 수 있었다.
“통과됐어, 미친놈들. 정이 떨어져서 여기 더 있고 싶지도 않아”
선미는 그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헤아리느라 잠시 대답을 못 했다.
“게이와 레스비안들에게 목사 안수를 주자는 안건 말이야, 통과됐다구”
그가 짜증스레 설명하는 소리를 듣고서야 생각이 났다.
“말도 안 돼, 아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미국 장로교단도 이제 다 된 거지. 물론 일년동안의 유예기간을 두고 각 교회의 의견을 수렴해서 다시 투표로 확정을 지을거라구는 하지만 투표할 놈들이 다 그놈들인걸 뭐. 교계마저 이 모양이니 애들이 뭘 배우겠어? 이 놈의 세상이 어디로 가려는 건지...”
마지막 회의에는 참석하지 않고 그냥 돌아오겠다며 남편이 전화를 끊은 후에야 선미는 이번에도 윤수가 집에 왔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났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좀체 굽히지 않는 남편이 집에 올 때쯤에는 화가 좀 풀어져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그녀는 윤수 방으로 갔다. 상처가 될 걸 아는지 모르는지 말을 서슴없이 해대는 남편이 아이의 행동 하나 하나를 트집잡을 생각을 하니 마음이 무거웠다. 어두운 방에서 혼자 자는 게 무섭다고 우는 일곱 살짜리 아이에게 사내자식이 그게 뭐가 무섭냐고 욱박지르던 남편이었다. 그녀는 어두운 방에 스위치를 올려 불을 켜놓고 나왔다.
시져스 팰리스라는 게이 술집은 다운타운의 뒷골목에 있었다. 낸시의 차를 타고 다운타운에 들어왔을 때는 이미 열시가 넘어 검은 빌딩들만 여기 저기 웅크리고 있을 뿐 다니는 차들도 별로 없이 으스스했다. 술집 뒤의 주차장에 차를 대고 낸시가 팔을 뻗어 뒷좌석에 있는 핸드백을 꺼내는 동안 선미는 문을 열고 자갈길로 내려섰다. 후미진 뒷골목이라 주차장이 포장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모양이었다. 불빛이라고는 주차장을 비추는 낮은 촉수의 가로등뿐이어서 주위가 그녀의 가슴 속 만큼이나 어두웠다.
저쪽에서 검은 그림자 하나가 흔들거리며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 초여름이건만 두터운 코트를 걸친 커다란 사내가 꾸부정하게 몸을 굽힌 채 손을 앞으로 내밀고 중얼거리며 걸어오는 모습이 돈을 달라는 것 같았다. 선미는 어깨에 걸었던 핸드백을 움켜쥐며 재빨리 낸시 옆으로 갔다. 가슴이 옥죄어들고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마약을 한 건지 술에 취한 건지 그는 계속 중얼거리며 그들을 스쳐 저쪽으로 걸어갔다. 그래도 내가 저 안에 있는 놈들보다는 죄가 없다, 그런 소리를 하는 듯 싶기도 했다.
한산한 거리와 달리 술집 안은 귀를 때리는 음악 소리와 담배연기로 후끈 달아 있었다. 입구에서 조심스레 입장료를 내밀자 길다란 속눈썹을 붙이고 두껍게 화장을 한 남자가 그들의 손등에 고무 도장을 꾹꾹 눌러주었다.
“잠시 바깥에 나갔다 들어올 때는 손등만 보여주면 되요”
그는 굵직한 목소리를 감추려들지도 않고 윙크를 했다.
날림으로 개조한 허술한 창고를 조잡한 가구들과 화려한 조명으로 감추려 든 홀 안은 마치 밤 화장을 짙게 한 늙은 작부의 얼굴 같았다. 중앙의 권투경기장 같이 네모난 링 안에서는 몸에 짝 달라붙는 빨간 드레스와 긴 가발의 흑인 청년이 몸을 흐느적거리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의 차림새와 화장은 거의 완벽해서 선미의 눈에도 예쁘게 보였다. 립싱크 솜씨도 뛰어나 잠시 머라이어 케리인가 착각이 들 지경이었다. 링 주위의 테이블에 앉은 남자들은 번들거리는 눈으로 술들을 마시고 있었다.
낸시와 선미는 벽 쪽의 구석진 자리로 갔다. 주문을 받으러 온 미니 스커트의 웨이트리스가 선미를 보자 환성을 지르며 팔을 벌리고 포옹을 하려 달려들었다.
“오우, 하니. 당신이 여길 와주다니. 너무 반가워요”
가게에 가끔씩 와서 싸구려 장신구를 사가는 청년이었다. 가게에서는 쭈뼛거리던 녀석이 자기가 노는 물이라 그런지 신바람이 잔뜩 나 있었다. 선미는 하는 수 없이 그 녀석과 억지 포옹을 했다. 녀석은 화장이 지워질까봐 실제로 뺨을 대지는 않고 입으로 쪽쪽 키스소리만 요란하게 냈다.
“가게에 가끔 오는 손님이에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낸시에게 설명을 하고 맥주를 두 병 주문한 후, 선미는 의자 등받이에 기대앉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대부분의 테이블에는 남자들이나 여자들이 둘씩 짝지어 앉아 있었는데 남녀 커플이 같이 앉은 테이블도 서넛 되었다. 그들의 눈에 자기들이 레스비안으로 비칠 생각을 하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 사이에 갈색 피부는 무대에서 내려가고 분홍색 비키니 차림에 기다란 깃털 목도리를 두른 여인이 굽 높은 카우보이 부츠를 신은 다리를 머리 위로 번쩍번쩍 들어올리며 음악에 맞춰 끼약 끼약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홀몬 주사를 맞았음에 틀림없는 것이 그의 가슴은 웬만한 여자보다 더 붕긋하게 솟아 비키니 위로 삐져 나올 지경이었다.
술을 마시던 남자들이 하나 둘 일어나 무대 주위로 몰려들었다. 춤을 끝낸 여인이 천천히 무대 가장자리를 돌며 웃음을 흘리자 남자들이 그의 브래지어와 팬티 속으로 돈을 찔러 넣었다. 차마 가까이 다가서지 못 하는 사람들의 돈을 받기 위해 그는 뱀처럼 머리를 흔들며 입을 벌렸다. 지폐가 그의 입술에 물려졌다. 박수소리와 웃음소리가 난무했다.
그가 엉덩이를 좌우로 흔들며 사라지자 무대가 어두워지며 디제이의 멘트가 흘러 나왔다.
“다음은 오늘의 특별 순서입니다. 너무나 아름답고 청순한 신인 듀엣, 체리 시스터즈를 소개합니다.”
애소하듯, 흐느끼듯 잔잔한 음악이 흐르고 천장의 미러 볼이 빙글빙글 돌며 사방으로 빛을 흩뿌리기 시작했다. 주위가 조용해졌다. 엉덩이를 간신히 덮었을 정도로 짧은 하얀 원피스 차림의 단발머리 소녀가 스폿 라이트를 받으며 무대 중앙으로 걸어나왔다.
옆에서 흐윽 짧게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들렸다. 낸시가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무대 위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스피커에서 어린아이같이 청순한 음성의 노래 소리가 흘러나왔다. 무대 위의 피터는 두 손으로 마이크를 잡은 채 눈을 감고 몸을 조금씩 흔들며 노래에 맞춰 입술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 절이 끝나자 빠른 템포로 음악이 바뀌며 스폿 라이트가 무대 왼쪽을 비췄다. 반짝거리는 까만 원피스의 단발머리가 춤을 추며 걸어나오고 있었다. 쪽 곧은 다리가 보기 좋았다. 순간, 낸시가 선미의 손을 꽉 잡았다. 동시에 선미의 목구멍으로 커다란 덩어리가 치받쳐 올라 숨이 턱 막혔다. 그녀는 희뜩희뜩 부서지는 불빛 사이로 무대 위를 노려봤다.
반바지 차림으로 환하게 웃으며 풀꽃을 들고 다가오는 어린 윤수의 얼굴이 까만 드레스의 얼굴 위에 겹쳐졌다. 부릅뜬 채 깜빡이지도 못하고 한 곳에 집중된 선미의 눈앞이 흐려졌다. 그녀는 두 주먹으로 눈을 마구 비볐다. 까만 드레스가 하얀 드레스에게 다가가 볼에 입을 맞췄다. 관객석에서 휘파람과 박수가 웃음소리와 함께 쏟아졌다. 윤수가 피터의 한쪽 어깨에 손을 얹은 채 그의 주위를 천천히 선정적인 자세로 돌기 시작했다.
낸시가 귀에 대고 뭐라고 말을 하는데 무슨 소린지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선미는 그 동안 손도 안 대고 있던 맥주 잔을 멀거니 바라봤다. 언제 땀이 났었는지 끈적한 팔뚝에 소름이 소르록 돋아 있었다.
그대로 뛰쳐나가고 싶은 생각과 무대를 계속 봐야한다는 생각이 속에서 뒤엉키는데 무력증에 걸린 사람처럼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헝겊으로 만든 인형처럼 맥없이 앉아 술잔만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머리 속으로 얼굴들이 떠올랐다. 여자 엉덩이처럼 풍만하게 보이기 위해 거들 속에 넣은 패드를 보여주겠다며 치마를 걷어올리던 청년, 솥뚜껑같이 커다란 손으로 반지를 고르던 중년 남자, 채 지워지지 않은 분홍색 매니큐어가 지저분하게 남아있던 백인 할아버지...
맥주 잔을 멀거니 바라보는 선미에게 오싹 한기가 들었다.
그녀는 천천히 허리를 굽혀 무릎 위에 놓인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이경숙
“가뭄 끝에 단비” 당선소감
장편 소설을 시작하고 중간도 가지 않아 힘이 부쳐 끙끙대고 있는데 한국에서 선배가 힘내라며 소설을 한 권 부쳐 주었다. 그걸 읽은 후 나는 오히려 컴퓨터를 덮어버렸다. 도저히 그렇게 쓸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엉망으로 자란 뒤뜰의 나무 넝쿨 사이에서 포이즈 아이비를 발견한 후 우울증이 도지려는 기미까지 보이고 있던 판에 당선 소식은 가뭄 끝의 단비같이 반가웠다.
“엄마 소설이 신문에 실리면 무슨 일이 벌어질 줄 아니? 모두들 내가 게이라고 생각할 거야” 시카고에 있는 동생에게 전화로 소식을 전하면서 낄낄대는 딸을 바라보며 녀석들이 몇날 며칠이 걸려 내 소설을 읽어낸다 해도 이해하기는 힘들겠다는 생각에 섭섭하기는 하지만 엄마를 자랑스러워하는 아이들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좋은 소식을 나눌 수 있게 도와주신 심사위원들에게 감사드리며, 이제 다시 힘을 내어 장편 소설에 도전해봐야겠다.
이경숙씨 약력
▲서울출생
▲이화여대 의류직물학과 졸업
▲일요신문사 기자
▲75년 도미
▲창조문예 단편소설부문 당선
▲해외동포 문학 소설부문 가작 당선
▲소설 ‘축복의 기쁨’ 번역
▲현재 롤리도, 오하이오에 거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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