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예술혼 꿰뚫는컬렉터 투시력 번뜩
1905년의 파리 오페라 하우스. 경매 중개인이 소개하는 매물 665번, 원숭이 모양의 뮤직 박스가 30프랑에 낙찰되고 매물 666번, 휘황찬란한 샹들리에가 무대에 오르던 ‘오페라의 유령’ 첫 장면을 기억해본다. 그 물건을 소장하고 있던 사람들의 가슴 아픈 추억 따위는 전혀 상관할 바가 아니라는 듯 감정이 들어있지 않은 건조한 목소리로 ‘저기 신사분, 20프랑, 네. 30프랑 받았습니다’를 반복하던 프롤로그.
경매시장의 양대 산맥인 소더비(Sotheby’s)와 크리스티(Christie’s) 같은 유명 회사에서는 일년에 두 번 메이저 세일을 갖는다. 박물관에서나 접할 수 있는 진귀한 미술작품들이 세계 각국에 순회 전시되고 난 뒤 경매 당일에는 전세계 미술애호가들이 한자리에 모인다. 이 두 번의 세일을 위해 경매회사는 일년 내내 바쁘게 움직이고 미술 애호가들 역시 이 날을 손꼽아 기다리니 가히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축제라 부를 만 하다. 특히 지난해 11월 런던에서 열렸던 소더비 경매에서는 우리 나라의 박수근 화백이 그린 ‘악(樂)’이 53만2,000파운드에 낙찰돼 화제를 불러모았다.
난 주말 샌타모니카의 ‘Bergamot Station Arts Center’에서는 LA의 소더비라고 할 수 있는 샌타모니카 경매가 일년만에 열렸다. 매 주말이면 미술관 경매와 벼룩 시장을 쫓아다니며 미술품 사냥에 바쁜 이창수씨(오리온 바디샵 대표)가 이런 기회를 놓칠 리 없다.
평소 다른 미술관 경매에서도 낯이 익은 김원실씨(조각가, 남가주 미술가 협회 부회장)와 사라 리씨(큐레이터)의 모습이 저만치 보인다. 반가운 마음에 손을 흔들고 한 자리에 모인 그들은 요즘 갤러리 소식을 주고받느라 시간 가는 줄을 모른다.
경매에는 파블로 피카소로부터 앤디 워홀, 대이빗 호크니로 이어지는 현대 미술 거장들의 작품이 모두 292점이나 출품됐다. 그 동안 이 보물들은 도대체 누구의 거실에 걸려있으면서 그들을 바라다보는 이들에게 어떤 감흥을 주었던 것일까. 세상에 빛을 드러낸 작품들을 눈앞에 대하자니 캔버스 앞에서 예술 혼을 불사른 화가와 그들의 재능을 알아본 컬렉터들의 영혼이 마치 잘 알고 있는 지인인 양 가깝게 헤아려지는 것 같다.
거의 300개에 달하는 매물 가운데 이창수 씨의 관심을 끌었던 것은 까를로스 알마라즈가 그린 ‘밤의 프리웨이’와 이레인 하드위크올리비에리의 ‘나비의 숨결’이라는 작품. 그저 일상일 수도 있는 LA의 프리웨이를 보라와 노랑 등 강렬한 색채로 표현해 낸 유화는 그의 눈을 단박에 사로잡았다.
추정 가격이 7,000달러로 나왔으니 약 4,000달러로 경매가 시작될 터이다. ‘나비의 숨결’은 마치 열정의 삶을 살다간 프리다 칼로의 화풍처럼 원시적이면서도 뜨거운 에너지가 보기 좋았다.
정작 경매 시작 시간은 저녁 6시였지만 사람들은 2-3시간 전부터 찬찬히 자신이 관심을 갖고 있는 작품들을 돌아보고 있었다. 하지만 전시장에 있는 이들 모두가 장래 이 예술 작품들의 주인이 될 리는 없다.
진지하게 고개를 갸우뚱해가며 구입을 고려하는 이들도 있지만 단지 평소 볼 기회가 없었던 현대 예술 작품들을 가까이서 여유 있게 감상하며 즐기는 부류들도 적지 않다.
경매 시간이 가까워 오자 경매장에는 묘한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한다. 빨간 드레스를 입은 도우미들은 이름도 야릇한 칵테일 잔을 나르며 분위기를 돋운다. 오늘의 경매 중개인은 검은 색 수트를 말쑥하게 차려입은 금발의 미녀.
매물 1번. 닉 아지드의 알루미늄 조각 작품. 그녀는 짧고도 알차게 작가와 작품에 대한 소개를 마친 뒤 600달러에서부터 비딩을 시작한다. 그녀가 숨쉴 틈도 없이 여기저기서 번호표를 들어 가격은 금새 1,000달러대로 뛰어오른다.
26개의 작품에 대한 비딩이 끝나고 드디어 이창수 씨가 눈 여겨 봐두었던 ‘나비의 숨결’ 경매가 시작됐다. 짐작한 대로 4,000달러에 경매가 시작됐지만 예상가 7,000달러도 훌쩍 뛰어넘어 1만달러대로 달리기 시작한다. 양쪽 끝에 앉아 있던 노신사 둘은 장기 두는 식으로 장군 멍군 하며 자꾸 가격을 높이고 있으니 마음만 굴뚝같은 이창수씨는 침을 꼴깍 넘기며 구경하는 것 밖에 별 방법이 없다.
토요일 저녁의 경매로 매물 1번부터 107번까지가 모두 나갔고 108번부터 292번까지의 매물은 다음 날 오후 경매에서 다시 팔린다는 안내와 함께 장이 마감됐다. 번호표 한 번 들어보지 못했지만 오늘의 경매 참가는 그에게 있어 여러 모로 의미를 지닌다.
피카소나 모네, 세잔 등 유명화가의 작품의 낙찰가는 1,000만 달러를 훌쩍 넘어가지만 그렇다고 모든 경매가 이런 가격대에서만 가능한 것은 아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다. 미술품이라는 것은 예술가와 그 작품을 사랑하는 마음이 우러나야 그 참 가치를 알 수 있는 것.
경매현장에 가는 것은 꼭 구매로 이어지는 비딩 참여보다는 미술품 자체를 즐기며 안목을 키우는 것만으로도 그 의미가 크다. 여러 번의 경매 참가 후에는 부담 없이 경매에 다가갈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림을 산다는 것은 자기가 좋아하는 작품의 주인이 돼 눈이 시리도록 들여다 볼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투자의 목적 역시 간과할 수 없다. 많은 전시를 둘러보고 안목을 높이는 일이 중요한 것은 그 까닭이다. 투자인 만큼 철저한 자료조사가 선행돼야 함 역시 두말하면 잔소리. 참고적으로 유명 작가의 작품은 적어도 1년에 15퍼센트 정도는 가격이 인상된다고 한다.
본격적으로 미술품을 수집한 지 이제 1년 정도 되지만 그가 소장하고 있는 작품들은 경매 회사가 탐낼 만한 굵직한 것들이다.
장욱진의 ‘가족’, 김환기의 ‘무제’ 등 퇴근 후 집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그를 맞아주는 정겨운 그림들로 인해 그는 세상 사람들 모르는 보물을 품에 안고 있는 것처럼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다. 1년에 약 2점 정도만 구입해 5년 뒤 소장 작품 전시회를 열었으면 하는 그의 바람이 꼭 이루어지기를. 화가의 예술 혼을 알아준 컬렉터들은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던 그의 이름을 불러 꽃이 되게 한 시인에 다름 아니다.
흔히 경매라 하면 미술 작품을 떠올리게 되지만 골동품, 가구, 생활 소품 심지어는 오래된 와인, 시가, 유명인사의 소장품 등 경매 아이템은 세상 만물이라고 할 수 있다. 크리스티가 주최한 마릴린 먼로의 유품 경매는 죽어서도 신화가 된 그녀의 인기를 짐작하게 했고 지난해 12월 소더비의 희귀 와인 경매에서는 1799년 산 와인이 2만6,000달러라는 고가에 낙찰되었다. 21세기에 있어 경매는 분명 새로운 생활 패턴으로 자리잡게 될 것이라는 의견에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글 박지윤 객원기자·사진 홍재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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