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위주의 벗고 내용 알찬‘실무형’으로
본국 정치인들의 LA 발걸음이 잦아지고 있다. 뚜렷한 목적의식을 갖고 오기도 하지만 그저 정거장 삼아 쉬었다 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업무 차 들르건 휴식 차 머물건 힘깨나 쓰는 정치인이란 신분이라서 그 움직임에 쏠리는 관심은 작지 않다. 만나서 반갑고 본국정가 소식을 전해들으니 시원한 측면이 있지만 알맹이 없는 폼잡기로 씁쓸한 뒷맛을 남기기도 한다. 격식 보다 내용을 갖춘 ‘실무형 방문’이 돼야 한다는 지적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일방통행식 홍보·체면치레 립 서비스 그만
‘지인들 포위망’ 뚫고 2세들과 끈끈한 네트웍
주류 정치인·언론과의 관계증진에도 관심을
“그 동안 한국 정치인들이 LA를 방문할 때면 우아한 레스토랑에서 이민 1세들과 모임을 갖고 한국에서 했던 것과 똑같은 일을 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색다른 유형의 한 국회의원은 불고기 집에서 젊은 한인 신세대들과 함께 어울려 영어로 정서적 교감을 나누는 토론을 함으로써 이민 사회의 전통을 깨뜨렸다.”
LA타임스가 2000년 7월 28일자에 LA를 방문한 한 국회의원의 전향적 자세를 담은 기사의 한 토막이다. 대하기 편안한 1세들과 체류기간을 몽땅 소진하지 않고 잘 통하지 않을 것 같은 2세들과도 마주 않아 세대간 벽을 허문 용기를 높이 평가한 것이다. 최근 1.5-2세 정치인 보좌관들과의 간담회에서 이들에게 미국의 차세대 지도자로 발돋움할 것을 독려하고, 아울러 한미 양국간 정치인 보좌관 교류프로그램 제안에 대해서도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눈 한 정치인의 행보도 신선했다.
대민 봉사, 공공 복리, 사회 정의를 외치는 정치인이라면 이 정도는 돼야 하는 것이지만 하도 전도된 모습에 익숙해 온 터라 민초들에겐 잔잔한 충격으로 와 닿을 만하다. 사과상자에서 몹쓸 한 두 개를 가리켜 ‘썩은 사과’라고 한다. ‘물을 흐리는 소수’란 뜻으로 종종 비유되고 있지만 LA를 방문하는 정치인들의 모습을 묘사할 때 ‘썩은 사과’란 표현은 식상하다. 오히려 ‘보통 사과’란 말이 더 눈길을 끈다. 심하게 말하면, 많은 정치인들이 이곳을 오고가지만 정작 ‘보통 사과’가 드문 까닭이다.
한 한인은 얼마 전 동향출신 정치인 후원회로부터 간담회에 참석해 달라는 편지를 받았다. 이 한인은 그러나 이 정치인이 드러낸 철새 행각에 불쾌한 심기를 누를 수 없었다고 했다. 본국에서 골치 아픈 일이나 난처한 상황에 처했을 때 위기모면을 위해 미국으로 건너오는 게 아니냐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 이다.
또 다른 한인은 물의를 일으켜 ‘없어져야 할 정치인’ 중 하나로 꼽던 사람의 간담회 장소에서 측근 의원들과 악수하며 맘에 없는 미소를 지었던 것을 지금도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다. “한국에서 알고 지내던 선배가 몇 년만에 전화를 걸어와 반가운 나머지 자초지종을 캐묻지도 않고 부리나케 약속장소에 가보니 바로 평소 나라에 해를 끼쳤다고 믿는 정치인의 간담회 자리였다. 회장에 들어가지 않고, 선배의 소개로 측근 의원들과 악수를 나누고 멋 적은 미소로 한 두 마디 나누었지만 왠지 찜찜했다”고 했다.
이 한인은 선배가 이 정치인을 수행하고 왔다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그 자리에 가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이곳을 방문하는 정치인들에 대한 극단적인 거부감의 표출이지만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는 한인들이 상당수일 게다. 특정인에 대한 편견이나 거부감이라기보다는 그 동안 정치인들이 심어 놓은 이미지가 고스란히 투영됐다고 보는 게 정확할 것이다.
최근 한 국회의원과 만나 한인사회의 현안인 이중국적 문제 등에 대해 대화를 나누려던 한 한인은 의원의 안하무인격인 행동에 몹시 실망했다고 한다. 이 자리에 동석했단 다른 한인은 “이중국적 문제에 남다른 관심을 갖고 사례를 연구한 것을 토대로 설명하려는 순간 이 의원이 의자에서 슬그머니 일어나면서 딴청을 부렸다. 말을 꺼낸 사람만 무안해졌다. 설령 듣기 싫은 말이라 해도 동포사회에서 중요한 이슈에 대해 말문을 열었는데 그렇게 반응해서 되겠느냐”며 이 의원의 소양과 자질이 의심스럽다고 했다. ‘무거운’ 얘기를 듣고 싶지 않아도 들어야 하는 게 정치인의 자세임을 망각한 경우이다.
한인사회를 이용하려 들어서도 안 된다. 본국 언론에서 말을 잘못 했다간 일파만파가 될 것으로 여겨 민감한 이슈에 대해 한인언론에 일단 소견을 밝혀 역으로 본국의 반응을 떠보는 정치인도 있었다. 본국에서 반응이 나쁘면 귀국한 뒤 그런 뜻으로 말한 것이 아니라고 발뺌하면 그만이고 반응이 좋으면 귀국 후 자가발전 하는 얄팍한 술수로는 절대 ‘큰그릇’이 될 수 없다.
LA에 와서 대접받고 금배지 자랑한 뒤, 체면치레로 공허한 립 서비스나 하고 돌아가려 한다면 시계를 거꾸로 돌려놓고 사는 사람이다. LA는 정치인들이 본국에서 쌓인 스트레스를 푸는 장소가 아니다. 투표권은 없지만 본국정치인들이 무시할 수 없는 존재다. 본국과의 네트웍을 감안하면 무시할 수 없는 ‘간접 표밭’이랄 수도 있다. 이곳에 올 때는 정신을 곧추세우고 매사에 진지하고 임해야 할 것이다.
정치인들에게서 종종 드러나는 일방통행식 사고는 ‘리사이클링 통’이 아니라 ‘완전 폐기 통’에 버려야 할 구시대의 쓰레기다. 한국 정부의 정책을 홍보하는 것은 나쁘지 않다. 그러나 거기에서 그친다면 실효가 없을뿐더러 한인들을 무시한 처사라는 비난을 피하기 어렵다. 이곳에 왔으면 현지의 목소리에 더 귀를 기울여야 한다.
한인들의 의견개진이 설령 영양가 없는 중구난방이라 해도 취할 것이 있고 결국 본국 정부에 득이 될 수 있는 법이다. 속마음에 ‘교포=별 볼일 없는 사람’이란 등식을 품었더라도 타산지석이란 말을 잊어선 안 된가. “이건 이렇고 저건 저러하니 잘 알아듣고 따라라”하는 투라면 애당초 비행기 타고 멀리 올 필요가 없다. 초강력 파워인 인터넷을 이용하면 돈 안들이고 시간 절약하며 간단히 알릴 수 있는 일 아닌가.
또한 LA에 오면 한인들과 어울리지만 말고 주류사회와도 대면하는 게 자신은 물론, 본국과 한인사회 모두에 득이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LA시장, LA경찰국장, 한인타운을 관할하는 주 하원의원과 시의원을 만나 교류활성화 방안을 논의하고 한인사회에도 보다 폭넓은 관심을 가져 줄 것을 촉구할 수도 있다. 내정간섭의 범주에 들지 않으면서 얼마든지 기분 좋을 일이 수두룩하다. 주류언론과의 인터뷰를 자청해 한미관계 개선에 일조할 수도 있다. 이것이 바로 ‘알짜 외교’이며 ‘싱싱한 정치활동’이다.
시계추처럼 무신경하게 왔다가려면 아무도 모르게 소리소문 없이 하고, 커뮤니티에 얼굴을 내밀려면 한인사회의 현주소를 제대로 읽고 처신하길 바란다.
박봉현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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