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주일을 하루 앞둔 토요일에 큰며느리가 꽃을 가져왔다. 투명한 플래스틱 사각통에 담겨진 꽃은 연 분홍과 보라의 조화가 깔끔한 올킷이었다. 일반적으로 어머니날에는 카네이션을 달지만 특별하게 성의를 표시하고 싶어서 였는지 색다른 꽃으로 가져왔다.

아들 내외의 정성어린 대접을 받으니 마음이 뿌듯하다. “어머니, 내일 교회에 꽃 달고 가시는 것 잊지 마세요” 며느리는 꽃을 냉장고에 넣으며 직접 달아주지 못함이 서운하여 거듭 당부한다. 냉장고 안에서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오색 꿈에 젖어 있을 올킷을 다시 꺼내었다. 물기가 없어도 아직은 싱싱한 꽃, 찬찬히 드려다 본다. 탐스럽다. 곱다. 눈을 감고 향기를 맡는다. 하얗게 밀려간 세월 저쪽으로부터 아린 기억이 향기에 섞여 전해온다.

세월은 봄과 가을을 수 십 번 갈마들었고 푸른 잎을 수없이 시들게 했건만 해마다 이맘때면 도지는 병, 잊혀지지 않는 사부곡이다. 저린 그리움은 시간과 관계 없이 다시 고여 온다.
이곳에서는 어머니날, 아버지날이 따로 있지만 우리 가족이 한국에서 살던 시절에는 어버이날이라고 해서 부모님 은혜에 감사하며 함께 축하해 드렸다.

그해 어버이날에는 점심식사로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조기 매운탕을 만들어 드렸다. 결혼한 언니가 언제나 부모님에게 극진한 효녀 딸이기에 언니가 장을 봐가지고 와서 어머니와 함께 음식을 장만했고 아버지는 맛있게 드셨다. 다른 때는 식구들이 다 모이는 저녁에 축하해 드렸는데 1964년 5월 8일에는 무슨 연유에서였는지 오찬을 나눈 뒤, 언니는 집으로 갔고, 나는 외출을 했다가 좀 늦은 저녁에 돌아왔다.

골목으로 접어드니 우리 집 대문 앞에서 동네 어른들과 아버지 친구분들이 웅성거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내가 걸어오자 길을 내주며 어서 들어가 보라고 손짓하신다. 표정들이 너무 침통하여 어리벙벙하다. 택시를 타고 떠났던 언니가 젖먹이 조카를 끌어 안고 오열하고 있고 방 위쪽에 병풍이 쳐져 있었다.
어머니가 외출했다가 들어오는 나를 보시더니 어깨를 끌어안고 섧게 우신다.

“엄마, 무슨 일야.”
“아버지가 돌아 가셨어.”
아니 아버지가 돌아가시다니, 불과 몇시간 전 까지도 평소와 다름없이 이런 저런 말씀을 나누며 즐겁게 식사하시지 않았던가. 그리도 멀쩡하시던 아버지가 돌아가시다니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허공을 딛는 것 같은 현기증이 인다.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다니,” 내 입에서는 이말 이외에 다른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천식이 있으셔서 가끔씩 힘들어 하시긴 했었도 일상생활에 별 지장이 없으셨고, 몇 시간 후에 돌아가실 분이라면 무슨 증세라도 조금은 보였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도저히 납득되지 않았다.

식사후 식곤증이 인다며 잠시 눈을 부치겠다고 하시던 아버지가 몇 시간이 지나도 아무 기척이 없었다. 평소에 낮잠을 주무시지 않는 편인데 저녁때가 다 되어도 기침하지 않으시니, 어머니는 아버지를 깨우려 방으로 들어가셨다. 조심스러운 음성으로 아버지를 불렀으나 아무 반응이 없이 머리가 중심을 잃고 힘없이 옆으로 쳐져 있었다. 의사가 와서 강심제를 놓았으나 혼수상태를 벗어나지 못하시고 세상을 뜨셨다고 한다.

의사의 진단은 “심장마비”.
나는 병풍 안으로 들어가 아버지의 손을 만져 보았다. 체온이 아직 식지 않으신 것 같았다.

그저 평온하게 주무시는 것 같았다. 살아 계실 때와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벽에 걸려 있는 아버지의 사진이 미소를 머금고 나를 내려다 본다. 아버지와 눈이 마주 쳤다. “아버지!” 금방이라도 부드러운 음성으로 “오냐” 하실 것 만 같다. 사진을 오래 오래 바라 보았다. 다시 누워계신 아버지를 내려다 본다. 미소만 사라졌을뿐, 조금도 다름 없으신 나의 아버지. 효성스럽게 모셔보지도 못했는데---, 가슴이 조여온다. 비릿한 슬픔이 코 끝에 감긴다.

아주 어렸을 때, 아버지는 퇴근길에 과자를 사오셨다. 붕어과자, 부채과자. 태평양 전쟁중이라 물자가 귀한 시절이었는데도 아버지는 요술을 부리시듯 바삭바삭하고 고소한 과자를 거의 매일 한 봉지씩 우리들 손에 쥐어 주셨다. 아버지가 가방을 열고 과자를 꺼내 주신다. 나는 손을 내밀었다.
주위분들이 나를 끌어 냈다. 이제는 아버지가 아니라 시신이란다. 절차를 밟아 처리해야 한다며 나를 번쩍 들어 방 밖에다 내다 놓았다. 몽롱해지는 의식속에 과자봉지만 풍선처럼 둥둥 떠 간다.

그렇게 아버지는 가셨다. 어머니와 함께 두 딸 앞에서 맛있게 점심을 드시고 뭐가 그리 급하셨는지 황급히 떠나셨다.
태어남은 순서가 있어도 죽음엔 순서가 없다고, 이 세상 어느것도 영원한 것은 없다고, 언젠가는 우리 모두가 죽음을 맞게 된다고, 이렇게 애써 생각하지만 인정하기엔 너무 억울하고 현실로 받아들이기에 허망한 밤은 침묵속에 묻혀졌다.

아버지는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뭔가 집히는게 있으셨을까? 그 날 아침 아버지는 어머니와 삶과 죽음, 우리들의 장래에 대한 말씀을 많이 하셨다. 어머니와 이런저런 말씀을 나누시며 특히 죽음에 대한 말씀을 오래 하셨다. 노후를 대처하기 위한 사안들도 자상하게 말씀하셨다. 어머니는 아버지께서 늘 하시듯이 사려 깊은 성품에서 기인된, 그저 하시는 말씀으로만 들으셨다.그랬기에 그 날의 일들은 미로를 헤맬 때 처럼 방향을 알수 없었고 수 많은 생각의 편린들만 허공을 떠돌 뿐이었다.

군자 같으신분, 성품이 바르고 곧으신분, 자애심이 도타우셔 주변의 존경을 한 몸에 받으시던분-.
아버지 친구분들은 아버지가 후덕 군자이시기에 복 받은 죽음을 맞으셨다고 가족들을 위로했다. 그러나 가족의 입장, 특히 자식의 입장에서는 어찌 복받은 죽음이라고 할수 있겠는가. 유서 한 장, 유언 한 마디 남기지 못하고 젊은 나이에 갑자기 가셨는데---.

그후로도 오랫동안 어버이날은, 어머니 은혜에 감사하여 카네이션을 달아드리고 정성껏 모시는 한편, 믿어지지 않을 만큼 갑작스럽게 죽음의 길로 떠나신 아버지를 향한 추모로 인해, 핏덩이 보다 더 진한 설울이 목젖에 걸려 눈시울이 붉어지는 착잡한 날이었다.

카네이션이 필 때면 못다한 가슴속의 언어들이 속잎을 피워내고 내 가슴 눈물어린 기슭에서 떠나지 않는 그리움으로 아버지는 그렇게 마냥 서 계신다.

금년에도 카네이션은 봄부터 앞 다투어 피고 있다. 어머니도 이미 세상을 등지셨다. 세월이 많은 아픔을 지워간 지금에야, 사모의 정으로 그 은혜를 기리며, 내 가슴속 깊은 곳에 살아 계신 부모님께, 가장 고운 마음자리에서 피어난 사랑의 카네이션을 한없이 피워 드릴 수 있을 것 같다.


유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