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착착 차르르르… 비행기 발착을 알리는 공항 시간표가 검은 눈꺼풀처럼 꿀꺽거리며 접히던 풍경은 올드 타이머 이민자들에게 애수처럼 기억된다.
이제는 시간표도 디지털화 됐지만 떠남과 배웅, 환영과 석별의 현장인 공항엔 늘 묘한 흥분이 스며있다. 서울역 밤 기차의 정서처럼 기대와 불안, 설렘과 긴장을 안고 오는 사람들. 그런 승객들을 대하면서 공항을 집처럼 드나드는 항공사 직원들의 생활은 어떨까. 첫 비행기부터 밤 비행기까지 LA발 인천행 비행기를 ‘띄우고’ ‘받는’ 대한항공 공항지점 직원들의 하루를 체험해봤다.
◇싹싹한 아침 브리핑
“안녕하십니까. 오하이오 고자이마쓰. 아리가또 고자이마쓰.”
아침 7시. LAX 탐 브래들리 국제공항의 KAL 업무는 직원들의 인사 복창으로 시작한다. KAL의 모토, ‘첫인사 끝인사 잘하기’를 연습하기 위해서다. 허리를 45도 각도로 굽히며 한·일어 인사를 반복하는데 기자만 어색해 떨떠름할 뿐 10여명 남짓한 직원들 모두 편안한 표정이다. 오전 10시 30분발 인천행 첫 비행기가 동경 경유라 간단한 일본어 인사는 필수.
남들은 샤워장에서 잠을 떨칠 시간이지만 말쑥한 제복 차림에 머리까지 단정히 쪽찐 KAL 직원들은 6시 반부터 와 부산스럽다. 무조건 빠릿빠릿해야 하루살이가 고달프지 않겠다는 깨달음이 본능적으로 엄습한다.
드레스코드는 ‘누드색’ 스타킹과 검정색 구두. 샌들이나 색깔 있는 스타킹은 사절이다. 유니폼에 옅은 화장은 기본이고 긴 머리는 묶어 쪽쪄야 한다. 남자는 무스를 꼭 바르고, 코털이 삐쳐 나오면 안 된다는 규정도 있다.
조정실의 브렌다 김 과장은 브리핑 시트를 보며 영어 약자로 쓰는 ‘그들만의 언어’로 업무를 지시, 일일 임시직 직원을 주눅들게 한다. 안 그래도 낯선 제복, 어설픈 화장 발로 잔뜩 긴장됐는데 자칫하면 왕따나 뒷북 취급받을 판이다.
하루 동료들에게 잘 보이려고 ‘잘 부탁…’운운하고 싶었지만 몸매도 날렵한 직원들은 브리핑이 끝나자 일사불란하게 흩어지기 시작한다. 카운터로, 비행기 게이트로, 입국장으로-.
◇승객과의 교감, 카운터
7시30분. 승객들이 하나 둘 줄을 선다. 밖에서 볼 땐 카운터 저편이 몹시 궁금했는데, 여기 서고 보니 인파가 명멸하는 눈 앞 풍경이 별천지 같다.
동절기 항공편은 오전 10시30분과 11시20분, 밤 12시10분발 등 하루 3대. 서머 타임 후에는 오전 11시30분, 오후 12시30분, 밤 12시30분으로 바뀐다. 첫 비행기는 동경 경유라 일본 손님이 많다. 놀라운 건 간단한 영어조차 불편해하는 일본인들이 꽤 많다는 사실. 상큼한 외모의 한 남자승객은 창가자리가 좋으냐, 복도가 좋으냐는 질문에 멋쩍게 웃기만 해 되려 묻는 이쪽에서 오히려 당황하게 된다.
어디든 그렇지만 특히 카운터에서 환한 미소는 기본이다. 손님을 1대1로 대면하는 카운터는 대한항공의 이미지로 직결된다. 출근하자마자 카운터를 찾은 이대열 공항지점장은 “24시간 깨어있는 공항의 생명은 생동감”이라고 말한다. 이후로도 짐 찾는 곳, 활주로 등에서 이 지점장과 계속 맞닥뜨려 대한항공 공항지점장은 몸으로 뛰는(?) 직업이라는 걸 확인했다.
◇LA의 첫 인상…인바운드
다음 순서는 인바운드. 8시50분 도착 비행기를 ‘받으러’ 가는 것이다(‘받다’와 ‘띄우다’는 그들만의 은어다). 입국·수하물 그룹장의 김민태 계장은 공항 화장실이 몇 개고, 어디 박혀있는 지 속속들이 안다고 한다. 걸음이 어찌나 빠른지 뾰족구두를 신고 날듯이 따라가야 했다. 조정실 수 홍씨가 넌지시 말했다. “직원 중에서 견습 때 하이힐 굽 한번 안 부러진 사람 없을 걸요”
공항의 비밀통로들이 열리기 시작한 건 바로 이때. 김 계장이 매스터키로 어딘가의 문을 열고 또 여는데, 정신 차려보니 활주로다. 8시50분. 방금 도착한 비행기의 문 앞에 와 노크한다. 브리핑 받은 대로 서비스 직원들은 휠체어 3대를 미리 챙겨 도열해 있다.
비행기 밖에서 문이 열리기를 기다릴 때의 감동이란! 안과 밖 중 하나밖에 못 보는 인간 세계를 넘어선 기분이었다. 갑작스런 전갈. 한 승객의 어머니가 서울서 혼수상태에 빠져 위독하단다. 과거 영화배우 최민수씨는 LA도착 직후 어머니의 부음을 접하고 되돌아갔다고 한다. 인바운드가 가장 주력하는 건 ‘한마음 패밀리 케어’(약칭 팸) 서비스. 어린이 나 홀로 족이나 노인 등이 목적지까지 무사히 갈 수 있도록 돌봐준다.
다음 행선지, 수하물 찾는 곳(baggage claim)으로 다시 뛰었다. 시끌벅적한 배기지 클레임을 헤집고 다니는데 김 계장이 갑자기 후닥닥 달려가는 게 아닌가. 한 한인이 ‘패밀리 케어’라고 쓰인 꼬리표를 짐 가방에 달고 혼자 헤매고 있었던 것.
◇마지막 손님까지 스탠바이…아웃바운드
KAL 직원들은 마지막 손님이 탑승할 때까지 한 팀이 돼 움직인다. 카운터를 마감한 직원들도 아웃바운드로 부리나케 합류한다.
10시20분. 입국장은 승객 배웅에 분주하다. 기내로 반입하기 힘든 짐들을 추가로 부치고, 여권과 티켓을 점검하고, 노약자와 1등석 승객들을 먼저 들여보냈다. “안녕히 가십시오”, “Enjoy your flight” 라며 정중히 배웅한 날 보고 승객들은 풋내기 직원이라는 걸 눈치챘을까?
◇오전 근무 마감·주간 브리핑
다섯 시간을 화장실 한번 못 가고 뛰어다녔다. 긴장이 풀리면서 다리가 후들거린다. 마침 매주 목요일엔 주간 브리핑이 있단다. 두 번째 비행기를 보내고 한숨 돌린 뒤 삼삼오오 모였다. 서울 본사의 공지사항을 전하고 모범 서비스 직원을 표창하는 순서. 라스베가스에 사는 75세 임춘희 할머니가 보내온 편지가 소개됐다. 인천공항서 샤핑하다가 지갑을 두고 왔는데, KAL 직원이 집으로 부쳐 줘 감사하다며 쌈짓돈 30달러를 동봉해온 것.
“저희 직원들은 30달러 돌려드리고, 3만달러 짜리 고객 감동을 접수하기로 했습니다”로 끝맺는 멘트에 보람을 먹고산다는 게 이런 거구나 싶다. 1월 아웃바운드 정시출발률이 95%를 기록했다며 격려가 이어진 브리핑 시간은 몇 번이나 웃음보가 터질 만큼 화기애애했다.
오전을 무사히 보낸 직원들은 서류작업을 하고, 3시 반에 퇴근한다. 근무는 아침, 저녁 2교대로 저녁 팀은 5시 반에 와 밤 비행기를 책임진다. KAL 공항지점에는 116명의 직원들이 포진, 운송과 정비, 관제탑까지 곳곳에서 ‘하늘 가득히 사랑을∼’ 전하고 있다.
직원들의 한 마디◇직원들이 말하는 “공항은 이런 곳”
가장 인상 깊었던 건 직원들이 이 일을 너무나 ‘즐기고’ 있다는 점이다. 날마다 다른 승객들, 언제 터질지 모르는 해프닝 때문에 하루 하루가 새롭다고 한다. 다음은 직원들의 말...말...말.
▲“방송소리, 비행기 엔진 소리 안 들리면 불안합니다”(이대열 지점장, 1975년부터 공항서 근무해 생긴 직업병이라며)
▲“한 마디로, ‘본 투 서브’(born to serve)죠”(인바운드 김민태 계장, 공항직원의 기본정신을 묻자)
▲“쉬는 날엔 공항 해프닝이 궁금해 전화해서 물어봐요”(로드 컨트롤 담당 박소진씨, 파트타임으로 시작했는데 적성에 딱 맞아 눌러앉았다며)
▲“아침에 출근했는데, 인천공항에 폭설이 와서 비행기 3대가 모두 취소된 거 있죠”(조정과 수 홍씨, 예측불허 상황의 한 예로)
◇이런 승객은 싫어요
KAL 승객 중 80∼90%가 한인이다 보니 승객 매너는 곧 한국인의 매너와 다름없다. 다음은 블랙리스트에 오르기 딱 좋은 승객 유형.
▲빽 과시형: “짐 하나 더 부칠 거야. 뭐, 안 돼? 지점장 나와!” 서비스 정신으로 져 드리긴 하지만 힘 과시에 반말까지, 80년대 매너 아닌가요?(부치는 짐 허용개수는 1인당 2개, 무게는 개당 70파운드(32kg))
▲늑장 수속형: 비행기 출발 지연되면 손님들 성화에 직원들은 애간장이 탄다. 요즘 짐 검색 오래 걸리는 거 아시죠?
▲‘알아서 모셔’형: 모닝캄 등 VIP 손님들, 성심 다해 모시는데 고압적 태도는 곤란하죠.
▲취중 탑승형: 밤 비행기 손님들, 석별이 더 슬픈 ‘밤 정서’는 이해하지만 위험합니다.
◇에피소드…고충…
▲공항 직원들은 스타급 연예인을 자주 본다. 농구선수 매직 존슨, 축구황제 펠레, 영화배우 키아누리브스 등 세계적인 유명인 이름이 줄줄이 나온다. 덤덤한 KAL 직원들도 초년병 시절 몰래 사인 한 번씩은 받는데, 급한 김에 받는 데가 보딩 패스라고.
▲스타의 이면을 엿볼 수 있는 베스트·워스트 매너. 베스트 매너로는 정치인 한화갑씨, 개그맨 이홍열씨 등이 꼽혔다. 워스트 매너 유명인은 “찍히면 본인이 안 좋기 때문에 별로 없다”는 설명. 한 직원은 “에어라인은 소문이 빠르다”며 은근히 겁주기도. 유명세를 이용, 억지부리는 연예인은 이렇게 대한다. “나, 당신 몰라!”
▲성수기에는 대기자 명단이 30∼40명씩 된다. 그런데 상당했다고 호소해오는 승객은 왜 그렇게 많은지…. 한 직원은 결국 비행기 못 탄 한 승객으로부터 “당신, 저주할 거야”라는 악담을 들었다며 씁쓸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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