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이라크 공격을 둘러싸고 유엔의 안보리 상임이사국간의 분열과 대립이 심각한 국면으로 치닫고 있다.
상임이사국 5개국 중 영국은 미국을 지지하고 있지만 프랑스와 러시아가 반대하고 있으며 중국도 반대편에 가담하고 있다. 미국이 유엔 결의로 이라크 공격을 승인 받으려고 했던 기도는 상임이사국의 거부권 행사로 물거품이 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타격을 받은 나라는 미국이다. 미국이 처음부터 이라크를 테러 지원국으로 지목하여 미국의 생존을 위해 단독 공격을 한다고 했더라면 오히려 이런 곤경에는 처하지 않았을 것이다. 미국이 자국의 의사를 유엔의 의사로 둔갑시켜 이라크 전쟁의 명분을 강화하려 했던 것이 잘못이다. 유엔이 미국의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을 것이라는 착각이 이제는 통하지 않게 되었다.
이번 상황으로 타격을 입기는 유엔도 마찬가지이다. 세계의 모든 나라가 가입해 있는 유엔은 국가를 제재할 수 있는 유일한 국제기구로 자타의 인정을 받아왔다. 그러나 유엔의 거부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이라크 공격을 감행한다면 국가를 초월한 국제기구로서 유엔의 위상이 손상되고 말 것이다. 유엔의 위상 추락은 유엔에서 절대 권한을 누려온 안보리 상임이사국의 무기능, 무능력을 의미하기도 한다.
2차대전 후 미국의 주도로 결성된 유엔에서 안보리 상임이사국 5개국은 전승국으로서 특권을 누렸다. 대전 직후에는 이 5개국이 한통속이었기 때문에 자기네끼리 똘똘 뭉쳐서 세계를 좌지우지한다는 생각에서 서로를 보장하는 방편으로 거부권을 나눠 가졌다.
그러나 세계 정세가 바뀌면서 상임이사국간에 균열이 생겼다. 냉전시대에는 소련과 대결 구도에서 미, 영, 불, 중이 합심했다. 그런데 대만 중국이 본토 중국으로 대체되고 공산권의 몰락으로 냉전시대가 종식되자 대결구도가 바뀌었다.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미, 영과 이에 대립하는 불, 중, 러로 갈라지게 되었다. 미국의 수퍼 파워에 대한 견제구도가 생겨난 것이다.
이번 이라크 공격을 둘러싼 찬반도 이 대립구도의 반영에 불과한 것이다.
이라크 전쟁을 둘러싼 찬반론 속에서 미국과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의 위상이 모두 추락할 경우 세계는 새로운 국제관계를 모색하기 위한 재편작업을 서두르게 될 것이다. 미국은 유엔의 결성을 주도했고 유엔의 경비를 대부분 부담하고 있지만 유엔에서 외면당하는 처지이다.
냉전시대에는 비동맹국가들이 미국을 반대했고, 또 냉전시대 이후에는 아랍 및 아프리카 국가들이 수적 우세를 무기로 미국의 중동정책에 반대해 왔다. 미국이 이처럼 반대만 하는 유엔에 힘을 실어주는 일을 계속하지는 않을 것이다.
유엔의 다른 강대국들, 즉 안보리 상임이사국들도 이미 상임이사국으로 남아야 할 힘을 잃어버린 지 오래이다. 영국은 미국의 주변국가로 전락했고 프랑스는 고령화와 출산율 감소, 높은 인건비로 경제가 엉망이 되어 젊은이들이 떠나는 나라가 되고 있다. 러시아는 소련 붕괴 이후 기력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는 늙고 병든 나라이다.
경제와 기술의 퇴보로 곤경에 처해 있는 것은 독일도 마찬가지이다. 그런 프랑스, 러시아, 독일이 연합할 수 있는 것은 역사와 문화 전통을 공유하고 있는 데다 미국에 대한 견제심리와 오기가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나라마다 사정이 변하면서 국제관계는 변하게 되어 있다. 미국이 유엔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라크 전쟁을 강행할 경우 이는 세계 질서의 개편을 위한 신호탄이 될 것이다. 미국은 럼스펠드 국방장관이 늙은 유럽이라고 한 프랑스와 독일을 제치고 동구의 신유럽으로 이동할 것이다.
동구는 넓은 시장과 값싼 노동력을 제공하는 새로운 개발지역으로 미국에게는 서구보다도 중요한 지역이다. 서구보다 낙후한 동구의 입장에서는 서구에 예속되기보다는 미국과 협력하는 것을 원하게 될 것이다.
이밖에도 아시아에서는 호주와 필리핀, 일본이 서태평양의 방어벽이 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미관계는 매우 유동적일 수밖에 없다. 미국의 편에 포함될 수도 있고 제외될 수도 있을 것이다. 아프가니스탄에 이어 전후 이라크에 친미정부가 수립되면 중동지역에도 미국의 거점이 생기게 될 것이다. 이제 세계는 새로운 힘 겨루기의 시대로 들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기영 뉴욕지사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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