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 교육구의 한 초등학교 교사는 며칠 전 학생들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했다고 한다. 좋은 말만해도 시간이 부족할 어린 시절에 섬뜩한 ‘전쟁’이란 낱말을 꺼낼 수밖에 없는 현실 때문이다. ‘이라크와의 전쟁’ 논의는 더 이상 어른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정치에 무관심한 고교생들이 한마디씩 내놓는가 하면 초등학생들도 전쟁 얘기를 듣는다.
청소년들이 체하지 않고 소화할 수 있도록 거대담론을 잘게 부수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전쟁 결과를 고스란히 안고 살아야 하는 다음 세대들이니 소용돌이치는 역사의 현장에서 소외시킬 수도 없는 노릇이다.
전쟁 학습을 위해 전쟁을 지지하는 어른들이 반신반의하는 학생들을 설득하기 위해 가상 타운홀 미팅을 열었다. “(학생)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 없다고 배웠습니다. 이라크 국민들에게 민주주의를 선사한다는 목적이 전쟁이라는 수단을 정당화할 수 있습니까?” “(어른) 전쟁 이외엔 대안이 없다.”
이 때 한인학생이 돌출발언을 했다. “한국에서 많은 국민들이 박정희 독재정권에 항거하다 고문당하고 목숨을 잃었지만, 미국이 박정희 제거의 일환으로 서울 초토화 방안을 내놓았다면 한국민들이 찬성했겠습니까?” “(어른) 그 때와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학생) 신문이나 방송에 온통 대량살상무기란 표현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인도와의 잦은 분쟁으로 지역 안정을 위협하는 파키스탄도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는데, 왜 유독 핵무기 없는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만을 문제삼는지요?” “(어른) 후세인은 대량살상 무기를 자국민은 물론 우리에게도 사용할 수 있는 위험인물이기 때문이다.”
“(학생) 대량살상무기를 갖고 있더라도 우리에게 고분고분하면 가만 놔두고 위험하다고 판단되면 손을 본다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세계평화보다는 미국의 이익에 의해 전쟁을 한다는 뜻 아닙니까?” “(어른) 후세인을 살려두면 장래 더 큰 희생을 치르게 되니 하는 수 없다.” “(학생) 후세인이 9.11사건과 직접적인 연계가 없다고 하는데 왜 후세인을 타겟으로 합니까?” “(어른) 후세인은 우리에게 테러를 가할지 모른다. 그러니 이를 사전에 막아야 한다.”
“(학생) 안방에서 불이 나고 뒤뜰 귀퉁이에 있는 개집에서도 불이 붙었을 때 어느 불을 먼저 꺼야 합니까?” “(어른) 당연히 안방 불부터 꺼야지.” “(학생) 핵무기가 없고 미흡하나마 유엔 사찰단의 조사에 응하고 있는 후세인과, 핵무기 개발에 착수하고 유엔사찰단을 추방한 김정일 중 누가 더 위험한 인물입니까?” “(어른) 북한 문제는 외교적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안되면 할 수 없고.”
“(학생) 한편에서는 성경과 신학자들을 인용하면서 이번 전쟁이 정의로운 전쟁이라고 하는 반면, 성경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는 성직자 대다수는 이번 전쟁이 정의롭지 못한 전쟁이라고 지적하고 있는데 누구 말이 맞습니까?” “(어른) 성직자라고 해서 다 옳은 것은 아니다.”
“(학생) 9.11 테러 이후 국제사회는 테러조직을 궤멸하기 위한 미국의 아프간 공격을 지지했는데 왜 지금은 국제사회의 반발이 이토록 거셉니까?” “(어른) 반대하는 나라들은 자국의 이익 때문에 그렇다.” “(학생) 전쟁에 반대하는 많은 나라들은 세계 평화는 관심 없고 미국과 영국 등 전쟁 주도국만 세계평화를 추구한다는 말입니까?” “(어른) 아무튼 미국의 행동은 세계 평화를 위해 좋은 일이다.”
“(학생) 이라크 땅 밑에 석유가 없다해도 이라크 민주화를 위해 군사행동을 밀어붙이려 했겠습니까?” “(어른) 석유 때문이 아니라 독재자로부터 이라크 주민들을 해방시키고 지역사회의 안정을 되찾기 위함이다.” “(학생) 전쟁으로 아랍권 내 반미감정을 강화시켜 테러위험이 증가하는 것 아닙니까?” “(어른) 테러가 줄어들 것으로 본다. 어찌 됐든 후세인은 그냥 놔둘 수 없다.”
“(학생) 미국은 유엔 표결을 앞두고 이라크에 ‘3.17’ 최후통첩을 보냈는데 유엔 표결결과에 상관하지 않겠다는 겁니까?” “(어른)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 이 때 한인학생이 일어섰다. “유엔이 승인하면 공격의 면죄부로 삼고 유엔이 거부하면 불복하겠다는 태도이니, 민주 경선에 참여했다 판세가 불리해지자 불복한 이인제씨가 생각납니다.”
타운홀 미팅이 몇 시간 동안 계속됐지만 어른의 답변에 고개를 끄덕이는 학생은 드물었다. 대다수 학생은 ‘맛없는 음식’을 많이 먹어 속이 더부룩한 표정으로 삼삼오오 자리를 떴다. 이날 ‘전쟁 학습’은 실패작이었다.
박 봉 현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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