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든 연대들은 지난 50~60년대, 관객을 눈물바다로 몬 ‘검사와 여선생’이라는 신파극을 기억할 것이다. 얄궂은 운명의 두 사람이 엮어나가는 인생 드라마에 관객들은 눈물을 펑펑 쏟으며 극장 문을 나섰다.
그로부터 40년은 족히 흘렀을 엊그제(3월9일), 검사와 한 여성이 등장한 현실 세계의 ‘얄궂은 현장’이 실연됐다. 아니 정확하게 말해서 그 실제 상황의 주연은 ‘검사들’과 여성 장관과 그리고 이 나라의 최고 통치권자인 대통령도 등장한 이색 현장이었다. 흥미로 치자면 신파극을 분명 능가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헌정사 초유의 이 기이한 현장에 그들은 왜 함께 등장했는가. 분명 주연들은 신파조가 아닌 냉엄한 대사를 주고받았다. 한쪽 주연(대통령과 장관)은 칼을 든 집도의로, 다른 한쪽(검사들)은 그 집도를 거부하는 집단 반대파로 분했다.
외모는 단아하지만 강골기가 농후한 여성 장관(강금실 장관)은 썩어빠진 검사들을 찍어내기 위해 하루라도 빨리 칼을 대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막상 수술대 위에 누운 검사들은 라이선스도 갖지 않은 신출내기 40대 여성 장관을 불신했다. 수술을 하겠다 거니, 못 받겠다 거니 하고 실랑이가 벌어지는 가운데 여성 장관의 강력한 후원자인 대통령이 환자들을 설득하겠다며 자청해서 나선 것이 대토론 현장이었다.
젊은 검사 훈계들은 법무장관
한데 이날 토론에서 공수의 입장은 완전히 반전됐다. 한국의 검찰을 대변하기 위해 나온 10명의 젊은 검사들은 대통령과 장관을 마치 논고하듯 몰아세웠다. 2시간 가까이 진행된 토론 현장은 팽팽한 긴장의 연속이었다. 분명 자신들의 최고위 상관인 여성 장관이 질문 메모를 넘겨 달라고 청했지만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장관이 되기 전 말과 된 뒤 말이 다르다며 훈계도 들었다. 무안해진 탓인지 여성 장관도 격앙된 표정을 감추지 않은 채 검사들이 자신을 ‘점령군’으로 힐난했고 따졌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표현을 골라서 말하라”는 나무람이었다.
그들은 진정 겁없는 검사들이었다. 지존한 최고 통치권자를 향해 직설적인 언사도 마다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노 대통령이 당선 직후 지방 검사장에게 전화를 걸어 모종 로비를 했지 않았느냐는 뉘앙스의 말을 하는가 하면, 대통령 친형이 국세청장 인선에 개입한 의혹에 대해서도 따졌다. 대통령의 표정은 일그러지기 직전이었다. 그리고 내뱉듯이 말했다.
“이제 막가자는 거요?”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나가거나 검사들을 향해 호통이라도 칠 그런 표정이었다. 드디어 한 검사가 대통령 눈을 응시하며 한마디 던짐으로써 긴장은 절정에 달했다. “대통령이 바로 서야 나라가 바로 섭니다.” 아뿔싸! 대통령 참모들은 소스라치게 놀랐을 것이다. 저런 무엄한 자가 있는가. 감히 뉘 앞이라고 신소린가. 저걸 당장….
나는 그 날 벌어진 검사들과 여성 장관과 대통령의 입씨름을 보면서 ‘말의 인과응보’를 새삼 절감했다. 말은 한 대로 돌아온다고 했던가. ‘막말’일수록 부메랑이 될 확률은 더 높다. 12년전, 5공 청산을 위한 국회 청문회에서 ‘국회의원 노무현’의 활동은 눈부셨다. 그러나 그는 하지 말아야 할 말과 행동을 했다. 증언하고 있는 전두환씨를 향해 명패를 냅다 집어 던졌다.
발언대 위로 뛰어올라 욕설도 퍼댔다. 이런 기록도 머리를 때린다. 대통령 선거가 한창일 때, 노무현 후보는 “남북 관계만 잘 되면 다른 건 깽판 쳐도 좋다”고 말했다. 글쎄, 검사들이 그 말을 기억하고 깽판을 쳤을라고?-
노 대통령이 정부 내 서열로는 까마득한 검사들을 불러 놓고 허심탄회한 대화를 하고, 그것도 국민이 직접 보고 듣도록 TV 생중계를 요청한 것은 통큰 행동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한 검사로부터 “토론의 달인”이라는 칭찬 아닌 칭찬에다 “대통령의 약점”(노 대통령 표현)까지 듣고 앉아 있어야 했던 것은, 나 같은 이는 그 자신의 ‘막말의 기록들’을 상기하게 했고, 또 다른 이들에겐 “정말 깽판났구만”하는 개탄을 하게 만들었다.
신뢰 잃으면 리더십은 붕괴한다
나는 그 날의 토론을 야당이 주장하듯 “정치 쇼”라고는 생각 지 않는다. 문제를 정면으로 태클하는 ‘노무현식 정공법’으로 보고 싶다. 하지만 토론의 전 과정에서 여과 없이 드러난 여성 장관의 한계와 대통령의 내적 분노를 포함해서 이 나라 통치체제(리더십)가 심히 흔들리는 위기의 단초를 목격하고 장탄식을 했을 뿐이다. 검찰이라는 공직사회의 중추적 위치에 있는 검찰이 그 지휘부와 통치자를 불신하고 공개적으로 성토하고 나설 지경이라면 그 밖의 공무원들 생각이 어떤지는 뻔한 노릇 아닌가.
나는 무엇보다 나라가 제대로 되려면 통치자가 국민들로부터 신뢰와 존경을 받는 일이 시급하다고 믿는 사람 중의 하나다. 이 시점에서 막 취임한 노 대통령을 평가한다는 것은 시기상조일지 모른다. 문제는 시작이 반이란 말도 있고 ‘될성부른 싹’ 운운하는 말도 있다. 이제 노 대통령은 자신 안에 내재한 진짜 훌륭한 장점들을 꺼내 보이고 국민들을 안심시킬 절체절명의 시간을 맞고 있다. 남북 문제, 주한미군 문제, 경제 문제 등을 둘러싸고 국민들이 왜 불안해하는가를 심사숙고해야 한다. 자신의 정책을 반대하면 모두 ‘반개혁, 수구 반동’으로 몬 DJ식 이분법을 답습해선 안 된다.
안영모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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