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장벽 붕괴와 구 소련의 와해로 동서간의 냉전이 종식되면서 스파이들이 많이 자취를 감추는 듯 했다. 스파이들을 대체하고 나선 것이 지상의 운동화 자국까지 찍어낼 수 있을 정도로 성능이 뛰어난 최첨단 정찰위성과 도청장치 등 첩보장비들이었다. 이른바 전자 첩보활동을 의미하는 ‘엘린트(ELINT: Electronics Intelligence)’가 그것이다.
그렇지만 ‘엘린트’에도 불구하고 방첩망에 계속 구멍이 뚫리고 상대의 동향을 감지하는데 실패하는 사례들이 잇달아 발생하자 ‘인간 스파이’의 중요성이 다시 대두되기 시작했다. 사람이 정보수집의 주체가 되는 ‘휴민트(HUMINT: Human Intelligence)의 필요성을 절감한 미국 등 강대국들은 수년 전부터 요원수를 크게 늘리고 외교관, 평화봉사단원 등의 위장신분으로 상대국에 파견하는 스파이 공작에 엄청난 재원을 쏟아 붓고 있다. 기계가 아무리 뛰어나다 한들 인간만큼 첩보의 효율성이 높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스파이 하면 007시리즈의 영향 때문인지 조금은 낭만적인 느낌을 갖게 되지만 같은 뜻의 ‘간첩’이라는 우리말은 왠지 더 음습하고 부정적인 이미지를 준다. 공안정치가 기승을 부렸던 과거 한국에서는 간첩사건들이 국면전환용으로 자주 악용됐다. 정부가 궁지에 몰리게 될 때마다 어김없이 대규모 간첩단 적발사건이 발표돼 국민들을 혼란에 빠뜨리곤 했다. 그런 와중에서 무고한 지식인들이 상당수 희생되기도 했다. 군부독재가 종식된후 과거의 많은 간첩사건들이 실체가 전혀 없는 조작이었음이 하나둘씩 밝혀지고 있다.
한국의 간첩단 적발사건이 국내 정치적 목적에서 악용된 경우가 적지 않았다면 강대국들은 외교적 긴장관계가 생길 때마다 이를 이용하고 있는 측면이 많다. 미국과 러시아, 그리고 미국과 중국간에 마찰이 일어나고 관계가 경직될 때마다 거의 예외 없이 외교관 스파이 사건이 발표되고 대규모 추방이 뒤따르는 것이 이를 뒷받침 해 준다. 스파이사건이 국면을 반전시키거나 자국의 입지 강화용으로 오랜 세월 ‘전가의 보도’처럼 이용돼 온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오랫동안 북한을 드나든 친북인사인 LA한인 예정웅씨가 연방수사국에 의해 “북한 정보기관의 조종을 받아 미국의 국가기밀 취득해 온” 혐의로 체포 기소됐다. 공식적으로는 ‘외국정부 에이전트 등록법’을 위반했다는 혐의이지만 실제 기소내용은 예씨를 분명한 스파이로 간주하고 있다. 연방검찰의 기소장을 살펴보니 의심을 살만한 예씨의 행적이 적지 않다. 특히 지난 2000년 동구권 여행 후 상당액의 달러를 신고하지 않고 반입한 것 등은 석연치 않다. 예씨가 정말 북한을 위해 첩보활동을 해 왔는지, 그랬다면 그가 어떤 정보를 어떤 방식으로 취득해 전달해 왔는지는 재판을 통해 차차 밝혀질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 한편으로 개운치 않은 것은 정보당국의 예씨 체포 시점이다. 지금 미국과 북한간에는 핵 문제로 긴장이 최고조에 달해 있다. 무려 7년 동안이나 예씨를 추적 감시해 왔다는 정보당국이 왜 지난 5일 그를 갑자기 체포했는지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다. 당국은 북미간 긴장과 전혀 상관이 없는 일이라 강조하고 있지만 그 해명이 명쾌하지 않다.
그럴리는 없겠지만 이런저런 빌미를 잡아 놨다가 필요할 때마다 한 장 한장씩 꺼내 쓰는 약점잡기식 카드를 사용한 것이라면 그 정치적인 의도를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몇 년 전 중국을 위해 스파이 활동을 했다는 혐의로 체포돼 곤욕을 치렀던 국립 로스 앨러모스 원자력연구소의 연구원 리웬호는 재판 후 펴낸 책에서 “미국은 인종문제로 나를 스파이로 몰았다”고 말했다. 리웬호는 59가지의 혐의를 받고 독방에 9개월이나 억류됐다가 결국 재판에서 핵관련 정보를 개인컴퓨터에 내려 받았다는 한가지 혐의만 인정돼 풀려났다. ‘태산명동에 서일필‘은 바로 이런 일을 두고 하는 말이다.
리웬호가 이처럼 무려 59개의 혐의를 받으며 곤욕을 치른 데는 뉴욕타임스의 특종욕심이 크게 작용했다. “좀더 조사가 필요하다”는 FBI의 보도 자제 요청에도 불구하고 뉴욕타임스는 이 케이스를 성급히 터뜨리면서 연방정부의 정보관리의 허술함을 강력히 비판하고 나섰고 그 와중에서 리웬호는 자연스럽게 “미국을 배반한 천인공노할 중국인”이 돼 버렸다.
예씨가 실정법을 어기고 미국의 국익을 해치는 행위를 했다면 법이 정한 처벌을 받아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 판단은 재판부의 몫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혹여 주류언론들의 휩쓸리기식 보도경쟁으로 여론재판이 앞서지 않을까 하는 걱정 또한 고개를 든다.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는 사상과 이념의 차이에 우선한다. 예씨가 북한 스파이로 활동을 했는지 여부를 떠나 그 단죄의 과정은 투명하고 차분해야 한다. 그래서 이념적으로 예씨와 대척점에 서 있는 반북인사들도 그의 인권에는 관심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바로 이것이 한 사회의 성숙도를 말해주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조윤성<부국장겸 특집1부장>
yoonscho@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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