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유럽을 하나로 묶는 진정한 연대는 가치의 공유에 있다. 민주 정치, 자유, 인권 그리고 법치가 바로 그 공유의 가치들이다… 오늘날 그 가치들은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한 위협에 직면해 있다… 이라크 체제와 그 체제의 대량살상무기는 세계 안보에 명백한 위협이 되고 있다…”
1월30일자 월스트릿 저널에 실린 논평이다. 미국의 이라크 대량살상무기 파괴노력을 지지한다는 내용으로 이를 위해서는 미국과 유럽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언뜻 보면 우파 논객의 주장 같다.
그런데 그 필자의 이름이 색다르다. 토니 블레어, 바츨라프 하벨, 실비오 베르루스코니…. 영국, 체코, 이탈리아 등 8개 유럽국 정상들이 연명으로 논평을 발표한 것이다.
프랑스와 독일이 깜짝 놀란 모양이다. 그 두 나라를 제외한 유럽의 주요 나라 정상이 모두 들어있어서다. 여러 가지 이야기가 나오면서 곧 바로 ‘우파 음모설’이 제기됐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친미발언은 요즘 유럽에서는 ‘이단의 교리’로 취급되는 분위기이기 때문이다.
프랑스와 독일은 말할 것도 없다. 영국, 스페인, 이탈리아 등지에서도 미국의 이라크 공격 반대는 70%선에 이른다. 이라크 전쟁은 석유 전쟁이다. 미제국주의의 음모다. 유럽의 보통 사람들이 보이고 있는 시각이다.
‘모든 좋지 않은 건 미국 탓이다-. 마치 아랍권과도 같은 멘탈리티다. 반(反)미는 극좌파의 논리만이 아니다. 모든 이슈를 잠재우는 결집력이 가장 큰 정치 테마다. 마치 촛불시위와 같이.
유럽의 정치지도자로서 지켜야 할 첫 번째 계율은 그러므로 친미발언을 않는 것이다. 더구나 이라크 전쟁에서 부시와 같은 편에 선다는 성명을 낸다는 건 독약을 마시는 행위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정치적 자살, 그것도 집단자살이라도 하겠다는 이야기인가.
그리 간단치는 않아 보인다. 다른 측면이 있다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장기적 안목에서 내려진 냉정한 선택일 수도 있는 것이다.
전쟁은 모든 걸 변화시킨다. 동맹관계도 그렇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 후 동맹관계는 큰 변화를 겪었다. 냉전이 끝났다. 그리고 테러와의 전쟁이 시작됐다. 9.11이후 조성된 변화다. 그리고 이라크전이 임박했다. 미국을 축으로 한 동맹관계는 벌써부터 달라지고 있었다. 앞으로 급변을 예고하고 있다. 그 라인-업은 이미 시작됐고 다수 유럽국 지도자들은 확실히 미국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여기에 ‘그렇지만’이라는 단서가 붙는다. 민주체제의 정치 지도자가 여론이라는 거대한 흐름을 거스르며 나아가기가 쉽지 않아서다. 지도자의 고뇌, 정치적 용기, 도덕적 결단이란 말이 그래서 있는 것이다.
당장의 정치적 이득을 따지자면 내릴 수 없는 결정이다. 그 결정이 또 반드시 옳다고만 할 수도 없다. 그래서 고뇌가 따른다. 그러나 양심과 신념은 그 쪽으로의 결단을 촉구한다. 말하자면 지도자로서 일종의 통찰력이다. 소수이지만 건전한 기득권층의 여론도 그 방향이다. 그렇다. 아닌 것은 아닌 것이다. 외로운 결단에 나서는 것이다.
“반(反)미는 교양이다. 지식인이면 일찍이 매스터해야 할 필수과목이다. 나의 본심과는 관계없다. 세상이 그러하므로 공개석상에서는 반미성 발언으로 일관해야 한다. 모름지기 지식 산업에 종사하는 자로서 반드시 지켜야 할 조항이다.”
“반미는 거창한 제국주의 타도투쟁이라기보다는 하나의 패션이다. 이 땅의 젊은이라면 그 패션에 뒤져서는 안 된다. 휴대폰 목걸이처럼 항상 걸치고 다녀야 한다. 패션에 뒤질 때 따라오는 건 ‘왕따’다. 그런 흉측한 일이 나에게 있어서야 되겠는가.”
한국 이야기다. 반미, 더 나아가 혐미(嫌美)의 분위기는 유럽 수준이다. 선진형이 다 된 것 같다. 거기까지는 OK다. 그런데 빠진 게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닌 건 아니라고 감연히 외치는 지도자를 좀처럼 보기 어렵다는 점이다. 아니, 오히려 대중에 영합하는 정치인만 눈에 띈다.
기득권층도 그렇다. 몹시 움츠리고 있다는 소식이다. 소수가 됐지만 당당하게 할 말을 해야 한다는 의지가 안 보인다. ‘어차피 줄서기 사회가 한국인데 뭐 이제 와서…’의 분위기인 모양이다. 썩 건강치 않은 모습이다.
이게 선진 유럽형과 후진 한국형 축구…, 아니지, 아니지. 유럽형과 한국형 정치의 차이인지 모른다. 표퓰리즘은 안 된다는 신념의 정치 말이다.
그나저나 이게 다 부질 없는 소리 같다. 대통령이라는 사람은 김정일에게 막대한 뇌물을 주고 정상회담을 성사시킨 의혹을 받고 있는데 신 정부측은 벌써부터 얼렁뚱땅식 정치적 걸충안이란 걸 내놓고 얼버무리려 드는 판이니까.
옥 세 철<논설실장>
sechok@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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