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코스. 카다피. 사담…. 공통점은 무엇인가. 그들의 평전(評傳)이 한동안 유행을 탔다. 그리고 얼마 후 망했거나 위기상황을 맞았다. 그게 공통점이다.
마르코스는 시오도어 루즈벨트식으로 말하면 한 때 워싱턴의 총애를 받던 ‘미국의 S.O.B.’였다. 이런 마르코스의 평전이 유행을 탄 게 80년대 중반이다. 그 내용은 이렇다. 마르코스의 자랑인 항일전 경력은 가짜로 게걸스런 독재자에 불과하다는 것. 얼마 안돼 마르코스 정권은 무너졌다. 유명한 ‘피플 파워’(People Power)에 의해서다.
카다피도 한동안 미언론의 고정메뉴 역할을 했다. 냉전이 한창이던 80년대 사사건건 미국을 물고늘어진 카다피는 그야말로 ‘눈엣가시’였다. 미언론이 3류 악당으로 집중 묘사하기 시작하던 어느 날 숙소로 미사일이 날아들었다. 그는 간신히 목숨을 구했다. 이후 입이 무거워졌다.
사담은 10년이 넘는 미언론의 단골 고객이다. 본인은 물론이고 아들들의 잔학성까지 세세히 소개되면서 사담은 ‘악의 화신’으로 미국민의 뇌리에 각인됐다. 그리고 현재 풍전등화(風前燈火)의 상황을 맞고 있다.
최신 유행은 김정일 평전이다. 뉴스위크가 별도의 지면을 할애했다. 타임도 커버스토리로 다루었다. 뉴욕타임스 등 신문은 말할 것도 없다. CNN, ABC, NBC 등 메이저 네트웍도 김정일을 집중 조명하고 나섰다.
정서가 불안하다. 잔인한 인물이다. 심한 열등의식에 사로잡혀 있다. 지구상의 마지막 스탈린주의자다. 형편없는 플레이 보이다. 한 마디로 북한은 거대한 수용소이고 인권사각지대다. 이를 무대로 김정일은 원맨쇼를 하고 있다. 대체로 이런 식의 평이다.
또 이런 이야기도 나온다. 북한내 최고 의료진 천여명이 김정일과 같은 나이에, 같은 체형의 주민들을 인간 몰모트로 사용해 ‘지도자 동지’의 건강관리와 장수법을 연구하고 있다. 주민이 굶주려 죽어 가는 판에 김정일은 40억달러를 빼돌려 스위스 은행에 유치해 놓고 있다. 그의 최대 관심사는 가까운 혈족의 안녕일 뿐 북한 주민의 고통은 관심 밖이다.
‘북한 어린이들이 우라늄을 먹을 수는 없지 않은가’-. 콜린 파월의 말이다. 전 주민을 기아상태에 빠뜨리면서 핵개발에 여념이 없는 김정일이다. 미국 언론의 평이 결코 좋을 리가 없다.
동시에 묘한 보도들이 나온다. 해피 엔딩은 없다. 모두가 불길하다. 김정일 체제가 현재 구사하고 있는 핵위협 벼랑끝 전술은 다름 아닌 내부의 심각한 경제 및 통치 위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그 종착은 붕괴일 뿐이라는 게 하나같은 스토리다.
그 가능성의 하나가 북한내 강경파의 쿠데타다. 벼랑끝 전술로도 별다른 소득을 얻어내지 못할 때 군부나 당내 강경파의 쿠데타로 김정일은 실각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시나리오는 북한 주민의 대대적 엑소더스 상황 발생과 물려 있다. 김정일이 굶주린 주민을 먹여 살릴 수도 없고 한편으로는 군부를 만족시키지 못할 때 돌발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이다. 수백만 북한 주민이 탈출을 감행한다. 극도의 혼란상태에서 군부 봉기가 발생한다. 이 경우 김정일과 그 측근은 루마니아의 차우세스쿠가 맞은 상황을 맞지 말란 법도 없다는 것이다.
이런 관측은 북한내에 부정부패가 만연해 있고 군부도 딴 생각을 하고 있다는 징후를 근거로 나온 것이다.
그중 가능성이 가장 크고 또 워싱턴이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시나리오는 대대적 탈북사태다. 수백만 탈북자가 발생할 때 김정일 체제는 무너진다는 관측에서다. 또 이렇게 되면 북한은 핵폭탄을 제조할 시간적 여유도 가지지 못한다는 계산이다.
2003년 1월17일자 월스트릿 저널에는 특이한 논평이 실렸다. ‘헬싱키에서 평양까지’란 제목의 논평으로 16명의 보수파 해외정책 전문가들이 연명으로 부시 행정부가 중국이 탈북자에게 난민자격을 부여하도록 압력을 가할 것을 촉구하고 나선 것이다. 말하자면 보다 적극적인 인권정책을 도입해 대대적인 탈북을 유도하라는 게 이 논평의 요지다.
시나리오는 시나리오다. 문제는 부시 행정부의 의지다. 그 속내는 알 수 없다.
“한 정보당국자는 북한 핵문제와 관련된 행정부 당국의 논평을 하루하루 베이스로 쫓지 말라고 경고한다. 공개 성명으로는 마치 북한과 타협이라도 할 것 같지만 행정부 고위층의 실제 복안은 달라서다. 부시와 체니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건 김정일 제거다. 그들은 플랜을 가지고 있다. 그 문제는 이라크 다음에 처리될 것이다. 김정일은 그들에게 있어 현대판 히틀러다.” 뉴요커지의 최근 보도다. 어렴풋이 나마 부시 행정 부의 의중을 엿볼 수 있는 자료가 아닐까.
김정일 평전이 유행인 까닭은…. 글쎄, 각자 판단의 몫 같다.
옥 세 철<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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