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풍처럼 둘러싼 먼 산들은 전부 눈을 이고 있고 바람이 쇳소리를 내는 경주들판은 춥고 적막하다. 계절의 숲 속을 거닐어 보아도 인적은 없고 김유신 장군의 묘소길을 달려보아도 쓸쓸하기만한 벚꽃 길이다. 그러나 저 재주 많고 신명 많은 봄의 신이 마냥 가만있기만 하겠는가. 머지 않아 벌어질 꽃 대궐 속의 경주를 다시 찾으리라하는 기대감으로 마음을 달랜다.
경주와 동쪽 바다를 사이에 두고 솟아있는 산이 토함산과 함월산이다. 북쪽의 토함산 허리를 돌아서 감포쪽 바다로 나아가고 외동을 거쳐 함월산 산길을 빠져나가면 월성쪽 바다가 나온다. 같은 동해 바다라도 남쪽과 북쪽의 경관이 사뭇 다르다. 깎은 절벽과 험한 산이 가까이 있는 강릉 속초 등지의 북쪽과 낮은 산들이 바로 바다로 연이은 울산 등지의 남쪽 동해는 그 맛이 다르다는 말이다.
산이 바다 같고 바다가 산 같은 그 정다움과 평화로움은 남쪽 바다가 가지고 있는 특징이리라. 토함산과 함월산은 그 산들이 바다에 이르는 곳까지 왕이 명령을 내려 살생을 금했으니 백성들도 살생하는 사냥도구를 다 불태웠다고 한다. 짐승들에게도 은택을 베풀어 온산을 은혜롭게 하였으니 저 석굴암 부처님의 미소에 하마 아픔을 끼칠까봐 남녀와 노소가 모두 삼간 까닭이라고 한다.
지금은 토함산 중턱에 덕동호수가 만들어져서 경주시민의 수돗물 공급을 다 맡고 있고 특별한 영원한 사랑이 되어 있는 곳이다. 토함산 고갯마루에 올라서면 저 멀리 아스라이 동해 바다가 그림처럼 놓여있다. 그러나 계곡을 내려서 또 긴 평야길을 달려 바다에 닿기까지는 근 백리길을 가야한다.
응달진 곳은 눈이 쌓이고 얼음이 얼어 냉기가 음산하고 나물들이 파릇한 봄이 되어 겨울과 봄이 함께 하는 곳이 남도의 산골짝이다. 백리나 되는 이 대단한 계곡은 그러나 왜구들이 경주로 들어오는 침략의 길이기도 하여 신라의 사람들에게는 근심의 길이기도 했던가 보다. 아버지인 태종대왕을 따라 삼국통일의 길에 나섰던 문무왕은 갑옷과 투구를 벗어 토함산 기슭에 묻어 중국과 몽고의 위협이 없는 평화를 염원하고 죽은 몸은 바다에 뿌려 왜구가 출몰함을 막고자 했다.
문무왕이 죽자 동해앞바다에 있는 바위 밑에 유골을 묻으니 그 유명한 대왕암이라는 바위가 되었고 신문왕은 아버지의 은혜를 감사하여 그 넋을 위로하여 감은사를 짓고 바닷가에는 이견대를 쌓았다고 삼국유사는 전하고 있다.
지금은 흔적만 남기고 폐허가 되어 있는 감은사 절터는 이런저런 연유로 하여 더욱 정깊게 느껴진다. 혹자는 옛 절의 복원을 주장하는 이가 많이 있지만 나는 생각하되 절은 복원해서 무엇하랴 싶다. 꽉 찬 건물의 숲에서 보다도 넓은 터에 주춧돌만 남아있는 모습이 우리에게 더욱 짙은 감동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감은사 옛터에는 장대한 탑이 한 쌍으로 남아 있는 데 비에 젖고 구름에 씻겨서 이끼가 끼인 채로 천년을 버티고 서있어 우리를 감탄케한다.
지난 세월동안 또한 얼마나 많은 길손들의 눈길을 받았을 것인가. 이 쌍탑의 장대함에는 보는 사람마다 입을 벌려 다물줄을 모르게 하는데 이만은 해야 경주에서 백리길을 찾아온 노고를 대담하게 위로해 주며 천만년을 앞서서 있어온 토함산과 함월산을 존경하는 자세가 되는 것이며 동쪽바다의 왜구를 놀래주는 수호탑이 될 수가 있는 것이며 또 무엇보다도 높고 푸른 신라의 하늘에 끝없는 그리움을 호소하는 몸짓이 될 수 있으리라.
탑신에 앉아 눈길 가는데로 우리의 산천을 둘러보며 망연하여 스스로를 잊어버림을 수습할려고 힘썼다. 원래 감은사 쌍탑 옆에는 삼십만근이나 나가는 큰 종이 있었는데 왜인들이 이 종을 너무나 탐하여 일본으로 밀송하고자 강포구에서 뗏목을 지어 띄웠으나 곧 뒤집혀 바다속 깊이 종이 가라앉았다고 한다. 지금도 파도가 칠 때면 종소리가 들린다고 하는데 누구나 다 듣는 것은 아니라고 하니 답답한 노릇이다.
예로부터 마음에 종소리를 들으면 깨달음이 가까운 곳에 이르러 있다고 하는데 누추한 속한이 어찌 그런 큰 복을 누리랴. 어느 곳인들 특별한 고향이 있으리오마는 월성의 옛 절터와 정다운 바다를 보고 있으면 다른 곳으로 옮겨갈 생각이 끊어진다. 그러나 어쩌랴. 아침에 나선 길이 이미 땅거미가 시작하는 짧은 겨울철이다. 서둘러 함월산을 넘어 외동을 거쳐 경주로 돌아왔다. 서라벌의 봄을 기약하면서.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