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신부의 딸 캐리 권씨
하와이 사탕수수밭 노동자 딸로 태어나
남가주서 성장 LA일대 수없이 이사
어려운 살림불구 부모님 ‘교육’가장 중시
2세들 전문직, 3세들 7명이 박사“한인 이민 역사가 100년이 되었군요. ‘이민 100주년’이란 말만 들으면 눈물이 솟습니다. 부모님에 대한 감사 때문이지요.” 하와이 사탕수수밭 노동자의 딸로 태어나 한인 이민역사를 몸으로 살아온 산증인, 캐리 권씨(80)가 2003년을 맞는 느낌이다. 웨스트 LA, 405 프리웨이 인근의 조용한 주택가에서 만난 2세 할머니는 80세 노인답지 않은 건강한 모습이었다. 밝고 생동감 있는 태도로 방문객을 맞으며 이야기를 풀어냈는데 그런 그가 이민 100주년을 맞는 소감을 묻자 갑자기 눈이 충혈되며 감정을 억제하지 못했다.
“부모님 생각이 나서 그래요. 그 힘든 역경을 다 헤치며 자녀들이 모두 이 땅에서 성공적인 삶을 살도록 밑거름이 되어 주셨지요. 이 나라에서 태어나 살게 해준 부모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사탕수수밭 노동자와 사진신부의 직계 자녀들 중 몇 안 남은 생존자에 속하는 그는 1922년 캘리포니아의 맥스웰에서 태어났다. 평양이 고향인 부친 윤영호옹(1880~1979년)은 1905년께 하와이에 도착, 농장 노동자로 일하다가 1910년대 초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했다.
이후 1915년 사진 한 장 들고 이민온 김도연씨(1894~1987년)와 가정을 이루고 새크라멘토 인근의 멘티카, 맥스웰 등지에서 농장 노동자로 일하다가 남가주 위티어로 내려왔다. 자신이 4~5세 되던 그때부터를 캐리씨는 기억한다. “LA 일대를 수도 없이 이사했다”고 그는 성장기를 회상한다.
“참 가난하고 힘든 때였어요. 아버지는 오빠와 함께 과일노점을 했는데 아침부터 저녁때까지 일을 했기 때문에 대화는커녕 얼굴을 마주 대하기도 어려웠지요.”
가장 즐거운 기억이라면 국민회 모임이 있을 때마다 아버지가 3명의 오빠와 남동생 등 온가족을 작은 픽업트럭에 태우고 제퍼슨 거리의 장로교회로 데려 가던 일. 어른들 손에 이끌려 함께 어울리고 ‘국어학교’에서 ‘국문’도 같이 배우며 자란 2세들은 평생 혈육처럼 끈끈한 정을 가지고 살았다고 한다. 캐리씨의 어린 눈에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한인들 사이의 상부상조.
1930년대 후반 대공황기, 그가 LA의 베렌도 중학교에 다닐 무렵, 너무 형편이 어려워져서 가족은 다시 중가주 농장지대로 이사를 했다.
“1937년 여름 디뉴바로 갔는데 도착해 보니 우리 식구들 살집과 모든 것이 벌써 다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었어요. 집안의 큰일이며 아이들 돌보는 일 등 모든 일을 한인 이웃들이 서로 도와가며 오순도순 살았지요.”
어려운 살림을 하면서도 “부모님이 강조한 것은 교육”이었다.
“너희들은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며 아들 넷을 모두 대학에 가게 했어요. 그렇다고 학비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요. 형제들 모두 1년 공부하고 다음 1년은 휴학하며 학비를 벌어 다시 등록하기를 반복했지요. 딸인 나는 공부시킬 형편이 못되니 시집을 가라고 하시더군요.”
교육을 강조한 덕분에 이민 2세대에 접어들면서 이미 구강외과의, 치과의, 약사 등 전문직 종사자들이 배출되었고 14명에 달하는 3세대는 전원이 하버드, 스탠포드, MIT, UC버클리, UCLA 등의 대학을 졸업했으며 그중 7명은 박사학위 소지자이다.
캐리씨는 1941년 결혼했으나 이혼하고 1955년 재혼한 권영만씨와 함께 삼남매를 키웠다. 권씨 부부의 손자들을 포함, 이 집안의 4세대는 현재 모두 15명이다.
이민 1세대의 구심점이 국민회나 흥사단이었다면 남가주 이민 2세를 하나로 묶었던 단체는 한인회라고 번역될 수 있는 KACO(Korean American Civic Organization)이다. 한인들끼리 유대를 강화하고 정보를 교환함으로써 한민족으로서, 미국시민으로서 삶의 질을 향상하자는 목적으로 권씨의 오빠인 찰스 윤, 남편 권영만씨, 조지 오, 에디 백이 1961년 조직했다.
“정관에 표시되지 않은 진짜 설립 목적은 우리 아이들을 서로 만나게 해서 한인들끼리 결혼을 시키려는 것이었어요. 댄스 파티도 열며 서로 사귈 기회를 만들어 주었는데 뜻대로 안됐어요. 그래서 우리 2세들끼리 유대를 공고히 하는 단체로 키워나갔지요.”
AKCO는 1980년 11월까지 19년간 2세 커뮤니티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정치 이념이나 종교를 떠나 모두를 포괄하는 유일한 2세 조직이었다. 디너 회합에는 샘 요티 LA 시장, 에드먼드 브라운 캘리포니아 주지사, 주지사 선거 후보였던 로널드 레이건 등 주류사회 저명 인사들이 연사로 초청되곤 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행사는 매년 12월31일에 열렸던 제야 댄스파티. 모두가 성장을 하고 수백명이 모여 새해를 맞았다.
그러나 70년대 후반 들어서며 2세들은 점차 나이가 들고 3세들은 한인사회의 울타리를 벗어나 주류사회로 편입되면서 AKCO는 80년 잠정 휴회에 들어갔다. 그리고 11년 후인 지난 1991년 9월 정식으로 해체되었다.
“같은 민족이라는 절절한 유대감은 2세까지인 것 같아요. 3세부터는 그런 유대감이 없는 것이 아쉬워요. 그 아이들은 한인이 되기보다는 백인이 되고 싶어하지요.”
그러다 보니 결혼도 거의 비한인과 했다. 권씨 가족의 3세 14명중 한인 배우자를 맞은 사람은 단 한 명뿐이다.
이민 1세대였던 부모, 이민 2세인 자신과 형제들, 자녀와 손자 세대인 3세와 4세를 지켜보며 캐리씨가 느끼는 것은 ‘참 다르다’는 것이다. 1세와 2세는 이를 악물고 열심히 살았던데 반해 요즘 아이들은 도무지 심각한 것 없이 그저 즐겁게 살자는 태도여서 가끔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우리 세대는 백인들에게 우리도 잘 할 수 있다는 것 보여주기 위해 이를 악물고 열심히 살았던 것 같아요. 이 나라는 이민자의 나라인데 왜 우리를 이렇게 대하느냐는 무언의 항의였겠지요.”
인종적 편견을 가장 뼈아프게 느낀 것은 1940년대 중반 둘째 오빠인 찰스 윤씨가 치과의사 자격증을 땄을 때였다. 잉글우드에서 개업하기 위해 사무실을 물색하는 데 가는 곳마다 “안 된다”며 문전박대를 당했다. 너무 속이 상한 윤씨는 병까지 얻었고, 결국 중가주 딜레이노에 가서 개업을 했다. 시골이어서 의사가 귀해서인지 그 곳에서는 개업이 가능했다. 그 후 찰스 윤씨는 구강외과의사가 되기 위해 다시 LA로 내려와 공부를 한 후 베벌리힐스에서 성공적인 의사로 평생을 살았다.
찰스씨가 또 한번 겪은 인종차별은 주택 소유. 50년대만 해도 아시안은 주택을 소유할 수가 없었다. 마음에 드는 집을 찾은 후 백인 친구가 사서 그에게 되파는 방식으로 겨우 집을 장만할 수 있었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 그는 한인타운에 나가면 격세지감을 느낀다. 한인 이민자들의 삶의 환경이 놀랄 만큼 달라졌다. 주택도 소유할 수 없던 한인들이 이제는 한인타운을 형성하며 당당하게 살고 있다.
“어렸을 때 올림픽 거리 부근에서 살던 때도 있었어요. 그때는 평범한 상가거리였지요. 지금 가보면 한글 간판들이 줄을 이었어요. 정말 대단해요.” 80년을 이 땅에서 산 이민 선배로서 그는 후배 이민자들에게 이렇게 충고한다.
“지금의 이민 1세들은 좋은 조건을 가졌어요. 대개 고학력이어서 능력이 있고, 한인들끼리의 네트웍도 튼튼하고 법적 차별도 없어요. 나 자신이 되는 것, 다시 말해 자기의 재능과 능력에 따라 역할을 담당하며 미국사회의 좋은 시민이 되는 것이 이민자의 삶의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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