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대양 대법원장
이민가족 1백년사
초기 한인 이민 선조들이 새로운 삶과 꿈을 위해 노동 이민선에 몸을 싣고 호놀룰루 항에 내린 지 어언 일 백년. 이들이 한인 미주 이민의 개척지이자 성지인 하와이 땅에서 이민사의 공식적인 첫 장을 기록한 후 그곳에는 그 후예들이 주류사회에 깊숙이 뿌리내리며 한 세기를 뻗어온 이민사의 당당한 흐름을 이어가고 있다.
하와이 이민 선조들의 후예 중에는 초기 노동 이민자의 3세로 100% 한인 혈통인 문대양(62·영어명 로날드) 하와이주 대법원장이 우뚝 솟아있다. 지난 1993년 하와이주 대법원장에 선임돼 9년째 하와이 최고 법원을 이끌고 있는 그는 현재 미 법조계에서 아시아계로는 최고 지위로 하와이 코리안 아메리칸의 표상이 되고 있다.
조부 게일릭호 102명 ‘이민사 첫장’
농장·사업 전전하며 교육열 남달라
후손들 변호사·의사로 가계 두각
현재 하와이에는 초기 사탕수수 이민자와 사진신부가 결합해 탄생한 소위 ‘시조 가정’들이 명맥을 이어 내려오고 있는데 문 대법원장의 가문도 그중 하나다. 1903년 건너온 이민 선조에서 시작된 그의 가문은 현재 그의 손자대인 한인 5세까지 뻗어나가 하와이를 비롯한 미 전역에 자랑스런 한인의 뿌리를 내리며 살고 있다. 하와이 한인사의 대표 인물 중 하나인 문 대법원장의 가계사는 바로 하와이 한인 이민사의 중심을 관통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문 대법원장의 모친 메리 문(84) 여사의 회고와 여러 기록을 토대로 문 대법원장의 가족사를 개관하면서 미주한인 이민 100년사의 주요 줄기를 되짚어본다.
1903년 1월13일 게일릭호를 타고 호놀룰루 항에 내린 최초의 공식 이민자 102명을 필두로 1905년 7월까지 약 2년반의 기간 동안 총 65편의 이민선을 통해 도합 7,800여명의 한인 노동 이민자들이 하와이로 건너왔다. 사탕수수 농장과 노동 계약을 맺고 하와이 땅에 내린 이들은 호놀룰루 항이 속한 주섬 오아후(Oahu) 뿐 아니라 이웃 섬인 마우이(Maui), 카우아이(Kauai), 그리고 빅 아일랜드라 불리는 하와이(Hawaii)에 산재해 있는 각 사탕수수 농장으로 흩어져 힘든 노동 이민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공식 이민 첫 해인 1903년 하와이에 도착한 초기 노동 이민자 그룹에는 바로 문 대법원장의 할아버지인 문정헌씨와 외할아버지인 이만기씨가 있었다. 평양 출신의 문정헌씨는 처음 빅 아일랜드에 있는 사탕수수 농장에서 노동자로 일하다 이후 사진신부를 맞아 결혼을 한다. 이들 부부 사이에서 3남1녀가 태어나는데 이중 둘째 아들이 후일 문 대법원장의 부친이 되는 문덕만(영어명 듀크)씨다.
한편 문 대법원장의 외조부인 이만기씨는 서울 출신으로 하와이로 오기 전 이미 한국에서 문 대법원장의 외할머니인 백시온씨와 혼인해 이미 딸을 하나 둔 상태였다. 문 대법원장의 할아버지와 같은 시기에 건너온 초기 사탕수수 노동 이민자들은 하와이 한인 이민사 제1기의 주축이었다. 이중 2,000여명이 미 본토로 재 이주했고 1,000여명은 본국으로 돌아가면서 남아있던 한인들도 차차 농장을 떠나 다른 직종이나 자영업 등으로 경제 기반을 꾸려갔다. 1910년부터는 하와이 이민 제2의 물결이라 할 수 있는 사진신부들이 들어오면서 하와이 한인 이민사회는 번성기를 맞게 된다.
사탕수수 농장을 떠난 한인들은 하와이 지역의 중심 도시인 호놀룰루와 파인애플 농장이 형성된 오아후섬 중심부의 와히아와(Wahiawa) 등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특히 1909년 군기지가 들어서면서 타운이 번성하기 시작한 와히아와는 1910년대 후반을 거치며 파인애플 농장에서 일자리를 찾거나 군인들을 상대로 한 세탁업 등에 진출하는 한인들이 모여들면서 한인 밀집촌을 형성, 1910년대와 20년대를 거치며 당시 한인사회의 중심부로 등장한다.
각각 다른 곳에서 사탕수수 노동자로 일하던 문 대법원장의 할아버지와 외할아버지도 보다 나은 삶을 위해 가족을 이끌고 농장을 떠난다.
이들 가족이 정착한 곳도 당시 한인 이민자들의 밀집촌으로 떠오르던 와히아와였다. 조부 문정헌씨는 이곳에서 양복점을, 외조부 이만기씨는 이발소를 운영하며 기반을 다져갔고 같은 지역에 살게 된 문씨와 이씨 집안은 서로 사돈을 맺게 된다. 문정헌씨의 아들로 한인 2세인 문덕만씨와 역시 한인 2세인 이만기씨의 딸 매리 이씨가 서로 만나 결혼을 하게 된 것. 바로 이들 사이에서 후일 하와이 제일의 법관이 되는 한인 3세 문대양이 태어나게 된다. 이때가 1세인 문정헌씨와 이만기씨가 초기 이민선에 몸을 싣고 하와이에 내린 지 37년의 세월이 흐른 1940년이었다.
40년대에 들어서면서 문 대법원장의 부친 문덕만씨는 자신의 부친 문정헌씨의 양복점을 물려받아 운영하게 되는데, 진주만이 일본군에게 공습 당하고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와히아와는 군인들이 많이 몰려들어 북적이게 된다. 이를 기회로 생각한 부친 문씨는 부인 메리 문 여사의 도움으로 양복점을 의류소매점으로 확대, 군인들을 상대로 비즈니스를 키워나갔다. 문 대법원장 부친의 영어이름 듀크(Duke)는 당시 가게를 찾던 군인들이 그의 한국이름 덕만(Duk Mann)이 부르기 힘들자 대신해서 붙여준 이름이라고 한다.
문 대법원장의 부모는 하루 12∼14시간씩 일하며 비즈니스에 심혈을 기울였고 어느덧 성장한 문 대법원장은 15∼16세가 되면서부터 가게에 나와서 부모의 일을 돕곤 했다고 한다. 문 대법원장은 와히아와에서의 학창시절 공부를 썩 즐기지는 않은 것 같다. 당시의 문 대법원장에 대해 메리 문 여사는 단지 “학교 때 친구가 너무 많았다”고 우회적으로 표현했다. 문 대법원장은 고등학교를 두 번이나 전학한 끝에 1958년 미드팩 하이스쿨을 졸업하고 본토 아이오와주로 대학을 가게 된다. 메리 문 여사는 “친구가 너무 많아서 일부러 아이오와로 보냈다”며 웃었다.
대학에서 심리학과 사회학을 전공하며 공부에 빠져든 문 대법원장은 62년 학사학위를 딴 뒤 그 해 가을 아이오와 주립대 법대에 진학, 후일 법관이 되는 길을 닦는다. 65년 법대 졸업하고 변호사 자격증을 딴 문 대법원장은 하와이로 돌아와 당시 하와이 연방지법 마틴 펜스 판사 사무실에서 일하며 법조계에 발을 디딘 뒤 검사직을 거친 후 합동 법률회사를 설립, 14년간 변호사로 활동하다 82년 판사로 다시 공직에 복귀, 대법원장에 까지 이르게 된다.
한인 초기 이민자들은 사업으로 성공한 일부를 제외하곤 대부분 가난 속에 삶을 마쳤으나 자식들에 대한 교육열이 남달랐고, 이것이 후대의 ‘화려한 개화’를 가져오는 밑거름 역할을 했다. 이에 관해 2세인 메리 문 여사는 “어머니가 매일 반복하는 말씀은 공부 잘하라는 것”이었다며 “나중에는 어머니도 겸연쩍었는지 ‘알지?’하고 묻는 것으로 대신했다”고 회고했다.
1915년생이었던 부친 문덕만씨 55세 되던 1970년 폐암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메리 문 여사는 “담배도 피지 않고 술도 못하면서 남을 돕는 일에만 열심이었는데 어떻게 폐암이 걸렸는지 아직도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회고했다.
문 대법원장의 모친 메리 문 여사는 현재 84세임에도 전혀 그의 나이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건강을 유지하고 있다. 미국에서 태어난 2세임에도 불구하고 ‘아이구’, ‘정말로’ 등 구수한 어휘를 연발하며 훌륭한 한국말을 구사하는 문 여사는 아직도 직접 운전을 하고 다니는 것은 물론 걸을 때는 마치 청년처럼 뛰어다니기도 한다. 메리 문 여사는 문 대법원장 부친의 이름을 따 Duke’s라는 상호를 단 이 의류점을 40년 넘게 직접 운영하다 지난 88년 은퇴했다. 지금 주인은 바뀌었지만 이 의류점은 와히아와 시내 같은 장소에서 아직도 Duke’s라는 간판을 달고 영업을 하고 있다.
문씨 가문의 3세대인 문 대법원장의 형제는 3남1녀로 장남인 문 대법원장에 이어 차남인 에릭 문씨도 법조계에 진출, 현재 오아후의 이웃섬 카우아이에서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고 3남 듀크 문 주니어는 호놀룰루시 공무원으로 재직하고 있으며 막내딸 메리는 언어치료 전문가로 오리건주에 살고 있다. 또 4세대인 문 대법원장의 자녀들은 의사인 두 아들 로날드 주니어와 스캇, 그리고 딸 줄리 등 2남1녀로 문 대법원장은 이들에게서 벌써 손자를 다섯이나 봤다. 100년전 노동 이민자로 뿌리내린 문씨 가문의 줄기가 어언 5대까지 뻗어나간 것이다.
사랑방 ‘코리안아메리칸 클럽’
1925년 창설
자손대대로 회원
이민애환 나누는
유일한 사교장
하와이의 주도 호놀룰루에서 북쪽으로 45마일 가량 떨어진 곳의 오아후섬 중심부에 위치한 소도시 와히아와는 초기 하와이 한인 이민사회의 중심지였다. 초창기 사탕수수 이민자들이 새로운 삶을 찾아 농장을 떠난 뒤 오아후섬 중심 지역의 파인애플 농장을 비롯한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몰려든 와히아와는 지금도 제법 많은 한인 이민자 2·3·4세들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곳이다.
문대양 하와이주 대법원장의 고향이기도 한 이곳에 오아후 한인사회의 구심체 역할을 한 ‘코리안 아메리칸 클럽(KAC)’이 있다. 1925년 창설된 이 단체는 77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사탕수수농장 한인 이민자 2세들을 주축으로 명맥을 이어 내려오고 있다. 현재 문 대법원장의 모친 메리 문(84)여사 등 22명의 회원들이 활동하고 있는데 회장은 문 대법원장의 이모인 루스 이 맥(80) 여사가 맡고 있다.
회장인 루스 여사에 따르면 코리안 아메리칸 클럽은 당시 한인 이민1세이던 클로드 오언(당시 아주 어린 연령이었던 현재 회원들은 창립자의 정확한 한국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다. 창립자의 성은 오씨 또는 원씨일 것으로 추정되나 확실치 않다)씨가 와히아와의 한인사회가 점점 커지자 한인들끼리 뿐 아니라 미국인들과도 교류를 나눌 목적으로 발족됐다고 한다.
코리안 아메리칸 클럽은 현재의 캄(Kam) 하이웨이 부지에 클럽의 건물을 짓고 이곳에서 한 달에 한 번씩 모여 서로 음식을 나누며 이민생활과 조국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고 당시 메모리얼데이가 되면 함께 인근 묘지를 방문해 군인들을 추모하는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고 한다.
루스 여사는 “그 당시 한인들이 교회 이외에 함께 모일 기회라고는 코리안 아메리칸 클럽 활동이 유일한 것이었다”고 회고하고 있는데 당시 클럽의 모임 때에는 보통 100명이 넘는 회원과 가족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또 클럽의 활동이 한창이던 시기에는 호놀룰루 등 오아후 전역에서 한인들이 모여들었다고 하니 코리안 아메리칸 클럽이 당시 한인사회에서 얼마만큼 구심점의 역할을 했는지를 상상할 수 있다.
이 클럽의 멤버들은 부모가 사망하면 그 자녀가 회원 자격을 이어받아 지금까지 이어내려오고 있는데 현대에 들어서는 회원의 자손이 4년제 대학에 들어가면 연간 1,500달러씩 학비를 지원하는 장학사업을 현재 15년 가까이 계속해오고 있다고 한다.
현재 와히아와 상권의 중심지에 위치한 코리안 아메리칸 클럽은 최근 한인 건축업체 대표인 최병식씨에 의뢰, 옛 클럽 건물이 있던 부지에 현대식 상가 건물을 새로 지어 분양을 시작했다. 이를 통해 한인 후손들에게 경제활동의 터전을 마련해주고 수익금으로 장학사업의 재원을 마련한다는 취지라는 설명이다.
코리안 아메리칸 클럽을 기념해 건물 이름을 KAC빌딩이라고 붙였다는 최 대표는 “이민 100주년을 맞아 하와이 한인 선조들의 삶의 뿌리가 시작된 와히아와 지역에서, 그것도 선조들이 마련해놓은 터전에서 후손들이 새로운 삶을 일구어 나간다면 역사적으로 의의있는 일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와히아와 한인교회
이승만 박사 창립 80년 역사
독립운동 33인 박동완목사 시무
와히아와 지역에서 창립 84년 전통을 이어 내려오고 있는 와히아와 한인교회는 아직도 하와이 한인 이민사의 생생한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곳이다.
1918년 이승만 박사가 한인기독교회를 창립하면서 하와이 각지에 세운 4개의 한인 교회 중 하나로 세워진 이 교회는 1922년 현재의 팜(Palm) 스트릿으로 이전한 뒤 지금까지 같은 장소에 자리를 지키고 있다.
원래 교회 건물 앞에 70년대에 신관을 새로 건축한 와히아와 한인교회는 여전히 초창기 건물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이 교회의 친교실과 사무실의 내부 벽에는 수많은 빛바랜 사진과 기념물들 등 지난 80여년의 세월의 기록들이 빽빽이 붙어 있어 가히 이 지역 한인 이민사의 박물관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이중에는 항일 독립운동가로 기미년 독립선언서 서명 33인 중 하나였던 박동완 목사의 사진도 포함돼 있다. 박동완 목사는 3·1운동으로 2년간 옥고를 치른 뒤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하와이로 망명, 바로 이 와히아와 한인교회에서 1927년부터 35년까지 목사로 재직하며 한인들에게 민족정신 고취에 힘썼다.
이 교회는 바로 문대양 대법원장 부친 가족을 비롯한 초기 이민자의 후손들이 함께 모여 신앙생활을 하며 민족의식을 키웠던 곳으로 아직도 문 대법원장의 모친 메리 문 여사와 이모 루스 이 맥 여사 등이 이 교회를 다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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