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10시간 중노동에 65센트 일당
김호·김형순‘최초 백만장자’탄생
회사수익 아낌없이 독립자금 헌납
70년대 이민붐 타고 업체크게 늘어
코리안 개척정신 열매 ‘주렁 주렁 ‘
가발·봉제·의류 상권 휘어잡아
4·29폭동·불경기로 큰 타격도
2세 고급인력 등장 한인경제 도약
한인타운도 90년대 거치며 대확장
미주 한인경제의 성장 역사는 한인사회의 발전사와 궤를 함께 한다. 1903년 1월13일 하와이에 닻을 내린 계약 노동자들의 땀과 눈물을 밑거름으로 성장의 기반을 닦은 한인경제는 제조, 금융, 서비스업의 줄기를 타고 정보통신(IT)의 열매를 피었다. 수 없는 시행착오에도 좌절하지 않고 사탕수수밭에서 벤처 캐피털까지 성공가도를 질주해온 한인경제 100년사를 돌아본다.
맨손으로 일군 기업의 꿈
(1903∼1965)
1903년 1월13일 ‘민재창’을 비롯한 102명의 사탕수수 노동자들이 미국 상선 게일릭호를 타고 하와이에 첫 발을 내렸다. 오늘날 말하는 취업이민의 효시였다. 이후 2년 동안 65척의 선박을 타고 모두 7,000여명의 노동자와 그 가족이 도착했다. 이들이 하루 10시간의 중노동을 하고 받은 임금은 당시 돈으로 하루 65센트, 월 16달러였다.
이들 가운데 중노동과 향수에 지친 2,000여명은 하와이 도착 후 얼마 안 돼 본토로 이주했다. 돌아갈 나라마저 잃은 이들에게는 캘리포니아가 유일한 기회의 땅이었다. 일부는 샌프란시스코를 거쳐 유타, 콜로라도, 와이오밍의 광산을 찾아 들어갔지만 대부분은 캘리포니아에 정착해 뿌리를 내렸다. 처음엔 식당 종업원, 청소부, 가정부, 정원사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했지만 결코 오갈 데 없는 자신들의 처지를 비관하지 않고 ‘꿈’을 향해 억척스럽게 돈을 모았다.
1910년 2월9일 드디어 한인들의 손으로 최초의 주식회사가 설립됐다. 리버사이드카운티 레드랜드에 모여 살던 이들이 자본금 3,000달러(주당 50센트)를 유치해 ‘흥업주식회사’를 설립한 것이다. 이후 한미무역(1910년), 허 리 상회(1911년), 한인농상(1914년), 북미상업(1917년) 등 오늘날의 ‘회사’ 개념에 포함시킬 수 있는 업체들이 속속 생겨났다. 물론 배운 기술이 농사밖에 없었던 터라 쌀 재배와 농산물 교역이 주업이었다.
주식회사에 이어 1920년대에 들어서는 한인 최초의 백만장자가 탄생했다. 1921년 프레스노 인근에서 청과물 재배 및 유통업을 했던 ‘김 브라더스’의 김호, 김형순 선생이 그들이었다. 자체 개발한 넥타린이 히트 상품이 되면서 이들에게는 백만장자 외에 ‘넥타린의 제왕’이라는 별칭이 붙어 다녔다. 30여년 동안 매년 100만달러 이상의 매출을 올린 두 김씨는 오늘날 LA 다운타운 청과상의 효시였을 뿐 아니라 한인 자본의 형성과 유통망 구축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김 브라더스’가 생산한 과일들을 위탁 판매한 ‘K& S’사의 김용중, 송철 선생도 성공한 재력가로 손꼽힌다. 1922년부터 ‘김 브라더스’ 생산품을 팔기 시작한 이들은 1928년에 회사를 설립하고 나중에는 자체농장을 운영하며 연 매출 200만달러의 ‘기업’을 일궈냈다. 송종익 선생 등이 발기인으로 참여, 5,000달러를 합작 투자한 ‘남가주 농산조합’도 각종 채소, 과일의 중간도매상으로 LA 다운타운을 주름잡았다.
당시 세워진 회사들은 요즘의 회사들과는 다소 차이가 있었다. 그들은 회사 이윤으로 자기 뱃속을 채우기 보다 일제치하의 고국을 위해 독립운동자금을 모으는데 힘을 쏟았다.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흥사단이 세웠던 북미실업과 대동실업(1917년), 동지회가 세운 동지식산회사(1925년)는 설립 목적부터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는 것이었다. 전국적 불황으로 회사 꾸려나가기조차 어려운 환경이었지만 당시 개척자들은 회사 수익을 아낌없이 독립운동 자금으로 던졌다.
조국 광복과 6·25전쟁의 롤러코스터를 타면서 한인경제는 한동안 소강상태를 거쳤다. 이 기간 노동인구의 유입도 거의 없었다. 1951∼1964년 사이 모두 1만4,027명이 미국으로 이민 왔지만 이 중 6,423명은 국제결혼을 한 여성이었고, 5,348명은 미국 가정에 입양된 고아들로 알려졌다. ‘김 브라더스’ 등 몇몇 회사만 명맥을 유지했고, 나머지 회사는 흥망성쇠를 거듭했다. 대부분 기술력과 자본력이 탄탄하지 못했던 탓이었다.
신 이민물결과 제조업 붐
(1965∼1995)
1965년 개정이민법이 연방의회를 통과하면서 한동안 발전을 주저했던 한인경제는 도약의 기반을 갖추게 됐다. 특히 1972년 대한항공이 태평양을 건너 서울-LA 노선에 취항하면서 한국 자본의 미국 유입도 봇물을 이뤘다. 센서스 통계에도 잡히지 않았던 한인경제의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했고 가발에 이어 봉제·의류업체가 잇달아 설립됐다. 한인상공회의소가 창립되고 대규모 자본형성이 이뤄지면서 한국계 은행이 미국에 닻을 내리기 시작한 것도 이때쯤이었다.
가발업은 농업과 허드렛일 위주였던 한인경제를 제조업으로 한 차원 끌어올린 지렛대 역할을 했다. 오늘날 한인경제가 괄목 성장을 이룰 수 있게 물꼬를 터준 기폭제였던 셈이다. ‘인모’(人毛)를 들여와 표백작업을 통해 노랑머리, 빨강머리를 만들어냈다. 기술이 앞선 업체들은 손님의 주문에 따라 머리색깔을 맞춰 팔기도 했고 1968년께는 합성섬유로 만든 인조모가 등장했다. 이용, 조규창씨 등이 당시 가발업계를 선도했던 사람들이다.
1972년 연방상무부가 처음으로 발표한 미 전국의 한인업체 수는 1,201개. 총 매출은 6,483만달러, 업체 당 평균 매출은 5만3,986달러였다. 신 이민 이전의 한인들이 대부분 맨몸으로 미국 땅에 떨어져 밑바닥부터 시작한 사람들이라면, 1965년 이후 신 이민의 물결을 타고 미국에 안착한 이들은 어느 정도 새로운 환경에 도전할 재정적인 준비를 갖추고 온 사람들이었다.
동포인구 급증과 함께 한인업체 수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상무부 통계에 따르면 5년 뒤인 1977년에 전국의 한인업체 숫자는 600%나 증가한 8,504개로 불어났고 10년 뒤인 1987년에는 그 보다 700% 이상 늘어난 6만9,304개로 집계됐다. 이들 업체의 총 매출은 업체 수의 증가율을 추월, 1977년 5억5,400만달러(754%), 1987년 70억8,200만달러(1,286%)로 각각 조사됐다. 1970년대 중반 한인업체들을 업종별로 분류하면 소매업이 3,766개(44.3%)로 절반 가까이 차지했고 각종 서비스업 3,286개(38.6%), 금융, 보험, 부동산업 235개(2.8%) 등 순으로 나타났다. 1903∼1965년 한인 경제의 산파역을 맡았던 농업은 제조, 금융, 소매, 서비스업의 부상에 따라 비 인기업종으로 저만치 밀려났다.
1980년대로 접어들어 의류, 섬유, 봉제업이 대형화의 바람을 타고 호황을 누렸다. 1982년 설립된 한미은행 등 한인 금융업계가 성장가도를 달릴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들 업종 덕분이었다. 심지어 교회 헌금도 이들 업계의 경기에 영향을 받는다는 농담이 나돌 정도였다. 업계 내 경쟁이 치열해 지면서 아예 염색과 재봉공장까지 겸업을 하는 업체들도 생겨났다. 처음에는 유행상품을 모방하는 데 그쳤던 업계가 자체 브랜드를 개발하는 수준으로 업그레이드됐고 1980년대 후반에는 ‘한집 걸러 한인업체’라고 할 만큼 다운타운의 상권을 꽉 휘어잡았다.
1992년 4월29일 발생한 4·29폭동은 의류·봉제와 함께 한인경제의 중심 축을 이뤘던 식품상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큰 상처를 남겼다. 당시 방화 및 약탈 피해를 입은 한인업소는 총 2,800여개로 단일업종으로는 리커, 식품상들의 피해가 가장 컸다. 1970년대 유대인이 남기고 간 사우스센트럴의 리커, 마켓을 인수, 짭짤한 재미를 봤던 한인 자영업자들은 인종 폭동이란 시한폭탄에 삶의 터전마저 잃고 말았다. 폭동 전 한참 호황을 구가할 때 1만5,000개 이상에 달했던 전국의 한인 소유 리커, 마켓은 1990년대 중반을 지나 1만개까지 숫자가 급속도로 줄어들면서 타 소수민족에게 빈자리를 넘겨주는 경향을 보였다.
폭동의 어두운 그림자는 1990년대 초반 전국을 휩쓸었던 불경기와 함께 한인업계 전반을 짓눌렀다. 식품상은 물론 의류, 봉제 등 한인경제의 주력 업종마저 휘청댔다. 하루아침에 파산을 하거나 야반도주하는 업자도 속출했다. 언어와 문화장벽 때문에 자영업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한인들은 2세가 중심이 된 화이트칼라의 성장과 함께 일대 전환기를 맞게 된 셈이다.
벤처신화와 성공시대
(1995-2003)
1990년대 중반 불경기의 긴 터널을 벗어나면서 20여년간 자본과 기술력을 축적해온 한인 경제는 2세 고급인력의 등장과 함께 21세기를 향한 새로운 도약의 준비를 갖췄다. 변호사, 공인회계사, 컴퓨터 엔지니어, 증권브로커, 경영컨설턴트 등 전문인들의 숫자가 해가 다르게 늘어갔고 벤처기업과 하이텍 IT 업체들도 속속 등장했다. 주류사회에 뿌리를 내리고 주식시장에서 ‘대박’을 터뜨리면서 한인경제에도 ‘스타 탄생’이 줄을 이었다.
‘자일랜’의 창업자 스티브 김씨는 스타탄생의 신호탄이었다. 김씨는 1993년에 설립한 회사를 2년여간의 초고속 성장기를 거쳐 직원 수 1,000명 이상을 두고 전 세계 70개국에 지사를 둔 대기업으로 성장시킨 신화적인 인물. 자일랜은 나스닥상장과 함께 1996년 타임지 선정 100대 초고속 성장 기업 중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북가주에서는 ‘암벡스 그룹’ 대표 이종문씨가 벤처신화를 이뤄냈다. 그는 1989년 개발한 그래픽 카드가 히트를 치면서 서서히 벤처업계의 주류로 떠오르기 시작, 1994년에는 ‘잉크’지가 선정한 초고속성장 미국 5백대 기업중 18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1996년 인터넷, 네트워킹, 멀디미디어 테크놀러지를 취급하는 암벡스를 설립한 이 회장은 자선사업가, 스탠포드대 아태연구소 교수로도 사회적 신망을 얻고있다.
LA와 중서부를 누비면서 미 주류사회 경제성장에도 큰 역할을 하고 있는 기업가들도 있다. ‘듀라코트’ 대표 홍명기씨와 ‘패코철강’ 대표 백영중씨가 그들. 홍씨는 리버사이드에서 특수코팅 페인트 제조업체를 경영하고 있으며 1,000여만달러를 투자, 앨라배마주 헌츠빌에 생산공장을 건설했다. 홍씨는 또한 한인사회 미래를 이끌어갈 지도자 양성과 장학사업 등을 위해 1,000만달러 규모의 비영리재단 ‘밝은 미래 재단’을 설립하기도 했다. 흥사단 장학생으로 미국에 유학 온 백씨는 H-빔으로 불리는 새로운 경 철강자재를 개발, 이 부문 미국 내 선두주자로 입지를 다지고 있으며 공장은 아칸소주에 있다.
불경기에도 끄덕 없이 최대 규모의 한인 의류업체 ‘포에버 21’을 키워낸 장도원씨도 성공시대를 선도한 인물. 1984년 LA 다운타운에서 1만1,000달러를 자본금으로 의류사업에 뛰어든 그는 18년이 지난 지금 전국 25개주에 120개 매장을 갖추고 연 매출 3억달러를 기록하는 업계의 큰손으로 성장했다. 봉제업계에서는 ‘구스 매뉴팩처링’(대표 구우율)이 2001년 LA카운티의 소수계기업 중에서 매출기준 7위(1억2,280만달러)를 기록했다. 구스가 제작한 브랜드 AG는 스포츠웨어 인터내셔널사에서 주는 2002∼2003년 여성 청바지 부문 최고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강종욱·종호 형제가 설립한 신소재 개발업체 ‘리퀴드 메탈 테크놀러지스’(LMT)는 2002년 뉴욕 나스닥에 상장되면서 주목을 끌었다. 한인운영 신소재업체가 나스닥에 상장되기는 LMT가 처음이었다. 리퀴드 메탈은 강도가 티타늄의 3배에 이르고 부식이 전혀 안 되는 반면 공정과정이 플라스틱과 유사해 생산비를 절감할 수 있는 차세대 소재로 각광받고 있다.
해외 동포사회의 중심인 LA 한인타운도 1990년대를 거치면서 눈부신 발전을 거듭했다. 올림픽 블러버드 인근에 집중돼 있던 한인업소들이 1990년대 초반 버몬트와 웨스턴 애비뉴를 따라 윌셔 블러버드, 6가로 북상하면서 타운상권이 크게 확대됐다. 특히 윌셔 블러버드 오피스건물들은 한인 화이트칼러들이 완전 장악했다. 내과의사인 데이빗 이씨를 중심으로 한 부동산투자그룹은 윌셔 블러버드의 오피스 건물만 30여개를 매입, LA부동산 업계의 큰손으로 부상했다.
한인경제 규모의 급팽창에 따라 금융업계도 발전을 거듭했다. 한국외환은행이 1974년 LA에 터를 잡은 후 80년 윌셔은행, 82년 한미은행에 이어 86년 중앙은행, 88년 미주은행(나라은행 전신), 91년에는 새한은행이 문을 열었다. 또 95년에 가주조흥은행, 2001년에 유니티은행, 그리고 2002년에 미래은행이 창립되면서 LA에만 한인은행 수가 9개로 불어났다. 1980년대 초 2억달러도 안되던 한인은행의 예금고는 2002년 현재 42억달러로 20배 이상 늘어났다.
이제 미주 한인경제는 30여년간의 고속성장을 바탕으로 580만 해외 동포경제를 선도해 가는 중심 축으로 자리를 굳혔다. 모국 경제에 대한 기여도도 높아졌다. 과거의 일방적 ‘의존관계’에서 벗어나 대등한 ‘동반자 관계’로 성장했다. 한국정부는 이 같은 미주한인을 주축으로 한 해외동포사회의 경제력을 국내산업 경쟁력 강화의 밑거름으로 삼기 위해 재외동포재단을 통해 한인 상공인들의 네트웍을 구축하고 나섰다. 사탕수수밭에서 월스트릿까지 땀과 눈물을 쏟아 일궈낸 한인사회 경제력은 이민 100주년을 맞는 시점에서 그 빛을 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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