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백여 일가·친척 함께 꿈을 펼쳐요
2년마다 뿌리모임
2~3세들 리유니언
간호협 RN코스 창설
후배들 취업 포함시
줄잡아 1천여명 초청
1903년 하와이에 102명의 첫 한국인 이민자가 발을 내딛음으로써 시작된 미국의 한인이민자 수는 100년만에 100만여명으로 늘어났다.이같은 이민인구 1만배 이상 증가는 좁은 한국 땅에서 ‘드넓은 희망의 나라 미국’으로의 진출을 꿈꾸고 실제 행동으로 옮긴 초기 이민자, 한인 1세들의 개척자 정신이 큰 몫을 했다. 뿌리째 옮겨 이식되는 고통과 아픔을 극복하고 나아가 식구나 친구, 이웃을 적극적으로 불러들여 온 수많은 선구자들이 있었기에 이제는 한인사회가 미국 각지에 번듯한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남가주 한인사회에서 성공한 기업인, 커뮤니티의 지도자, 봉사자로 이미 잘 알려진 유분자씨(67·비지비 프랜차이즈 대표)는 그런 맥락에서 볼 때 더 없는 개척자이며 선구자이자 꿈을 실천에 옮긴 사람으로 볼 수 있다.
그는 자신뿐 아니라 수많은 친지와 이웃, 동료들을 불러들여 가난 등의 어려움에서 구하고 이루기 힘들었던 그들의 꿈에도 날개를 달아줬다.
그는 초창기 20여년은 마치 한인들을 미국으로 불러들이기 위해 사는 사람처럼 뛰었다. “올 수만 있으면 무조건 나와야 한다” “해외에 나와주는 것이 조국을 위하는 길이다”를 사방에 강조하며 머뭇거리는 가족들과 이민 희망자들을 독려했다.
초청 가족들의 정착 뒷바라지도 물론 그의 차지였지만 그는 그같은 어려움을 달게 받아들였다. 이민 후 계속 2개 이상의 직업을 동시에 해가느라 잠을 줄이고 자신의 안락을 반납했다.
그래도 그는 “꿈을 성취하려는 각오와 조금씩 이뤄져 가는 보람이 더 컸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는 68년 처음 간호사로 미국에 도착한 뒤 75년 시민권을 받고 본격적인 이민 초청작업을 시작했다.
그로 인해 줄줄이 미국에 날아온 그의 직계 및 방계 가족수는 그래서 벌써 200여명이 넘는다. 또 해마다 이 숫자는 계속 늘어나고 있다. 그뿐 아니라 자신의 사업체인 ‘비지비’(Busy Bee) 고용관계로 또 계속 인력을 초청, 그 숫자만 해도 벌써 47명이 넘어섰다.
또 그가 71년에 남가주 한인간호협회를 창설하고 한인간호사들의 RN 자격증 준비코스를 개설, 한인 간호사의 이민과 취업을 도왔던 케이스는 미처 헤아릴 수도 없을 정도다.
당시 여성으로써 취업 이민을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분야였던 간호사들의 초청과 취업은 간호사 자격증을 따는 것이 관건이었다. 자격증을 따서 취업하여 그들은 다시 그들 가족과 친지들을 미국에 초청했기 때문에 유씨의 간호사 자격증 준비 코스 개설이라는 아이디어는 70년대와 80년대의 엄청난 한인 이민 붐을 뒷받침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외에도 그의 삶과 말, 행동이 미국 이민의 꿈을 키우게 하고 그것이 이민의 배경이 되어 도미한 숫자도 또한 일일이 거명할 수 없다.
주변에서는 직·간접으로 그의 영향을 받아 미국 땅에 발을 붙이고 있는 한인들의 수가 1,000명은 훨씬 넘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유씨는 자신이 초청한 친지나 한인들의 이름도 잊고 숫자는 물론 알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자신이 직접 초청하거나 또는 이민 과정을 도와 미국에 온 이들이 남가주를 비롯해서 미국 전역에서 각자 제몫을 하고 있으며 이제 그 자녀들이 코리안 아메리칸 2세와 3세로 각각 주류사회로 뻗어나가고 있는 사실이 그저 대견하고 감개무량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앞으로도 끊임없이 한인들을 아직도 천혜의 땅인 미국으로 초청하고 또 이민하도록 돕겠다”고 한다. 특히 한국에서도 잘 살고 잘 지낼 수 있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한국에서 그랬듯 한국에서 ‘소망’이 없이 사는 한인들을 한사람이라도 더 데리고 오고 싶다고 한다.
그런 이들이 새로운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는 아직도 자신에게는 사랑과 희생으로 뛸 의욕이 남아 있다고 한다.
그는 충북 옥천 출생으로 생활이 어려워 대전 간호학교를 택했다. 졸업 후 세브란스 병원 간호사로 근무하면서 덕성여대, 숙명여대에서 다시 공부를 계속하는 등 학구열도 높았던 그는 미8군 병원 근무와 대한적십자 초대 간호사업국장으로 근무했다.
한국에서 초고속 승진을 거듭하던 그였지만 68년 텍사스주 달라스의 병원과 고용계약을 받아들인 후 서슴없이 계약을 하고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가부장적 제도하의 당시 한국에서 남편과 3세된 딸, 1세된 아들을 일시적이나마 떼 놓고(?) 해외로 혼자 진출할 당찬 각오를 한 이유에 대해 그는 “직장에서도 사회에서도 가부장적 제도에 짓눌려 희망이 없었다”고 말하고 있다. “나라도 먼저 헤쳐 나가야겠다고 굳은 결심을 했다”는 것이 배경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는 지금도 한국에서 제대로 꿈을 펼치지 못하는 사람들의 미국 이민을 돕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직계로 한 두 가족을 초청하는 것도 골치 아파하는 보통의 한인들과 비교하면 그는 정말 특별한 사람이다. 더욱 특별한 것은 그는 친지나 주변을 초청해서 초기 정착을 돕는 것에 그치지 않고 수십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연결고리를 갖고 ‘이민자 대모’로서의 음양의 영향을 끼치고 있다.
지난 1999년과 2001년에는 유씨에게 특별히 기억되는 이벤트가 LA에서 각각 열렸다.
그의 초청으로 대전에서 살던 어머니(한복님·78년 미국서 타계)와 한국 각지에 살던 모든 형제자매(3명의 오빠, 3명의 언니) 가족이 1975년 3월25일 한 비행기로 미국에 온 이후 처음으로 모든 직계가족들이 함께 모이는 기회를 가진 것이다.
그동안 미국 각지, 또 해외로 다시 뿔뿔이 흩어져서 다시 가족을 이루고 그들이 다시 자녀를 낳아서 누가 누군지 알지도 못하게 된 시점에서 이들의 뿌리 찾기 및 재결속시키는 프로젝트였다.
68년부터 시작된 유씨 일가의 미국 이민 족보를 정리해 보는 작업이기도 했다. 이번에는 유씨의 딸 캐롤 리(39·한국명 이주연. UEC사 회장)가 엄마를 대신해서 이 작업 지휘를 맡았다.
외조부모 대로부터 따지면 5대까지 내려가는 뿌리지도가 완성됐고 첫해인 1999년 크리스마스에는 이들 중 무려 87명이 필라델피아, 시애틀, 샌호제, 샌프란시스코에서부터 부에나팍 더블트리 호텔에 모였다.
직계 가족이면서도 서로 흩어져 정착하느라 오랫동안 서로 보지 못해 서먹서먹해 했던 이들, 특히 청소년기 자녀와 어린이들은 같이 하루 이틀을 지내면서 ‘물보다 진한 핏줄’의 위력 때문인지 부쩍 가까워졌다.
한번 시작된 이들의 리유니언은 2년 후인 2001년 크리스마스에 옥스퍼드 팰리스 호텔에서 다시 계속됐다. 이번에는 75명의 친척들이 더욱 더 친밀해진 마음으로 모였고 2년 전에 참가하지 못했던 한국, 중국, 파라과이로 이주해서 살던 가족들도 일부가 합류했다.
1999년 첫모임이 1세들이 주축이 되었다면 2001년 모임은 주로 2세들이 연락책이나 프로그램 등을 도맡아서 진행했다. 가계도 뿌리에는 2년 사이 더 늘어난 10여명 식구의 이름이 올랐다.
이들은 앞으로도 2년마다 한번씩 뿌리 모임을 계속해 나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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