톡 쏘는 맛 하나로만 뭉뚱그려진 소주가 애주가들의 끊임없는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은 변신을 거듭한 덕이다. 지난 65년 처음 시장에 나온 소주는 알콜도수 30도로 꽤 독했다. 몸을 망친다는 사회적 인식이 확산되면서 지난 74년 5도가 낮은 25도 소주가 탄생했다.
그러나 지난 96년 다시 2도를 낮춘 23도 소주가 출시되면서 25도 소주도 마시기 부담스러운 ‘독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이젠 20도 소주가 바통을 이어받았다. 당초 30도 소주를 떠올리면 소주라고 부르기도 멋 적지만 그래도 소주는 분명 소주다. 시대가 바뀌면서 소비자의 기호도 바뀐 것이다.
업체들은 뒷전에 처지다가 망하는 불상사를 당하지 않으려고 시장의 변화에 응해왔다. 변한 업체는 살아 남고 변화를 거부한 업체는 창고에 수북히 쌓인 재고 소주를 마시면서 신세한탄만 늘어놓아야 함을 잘 알고 있었다. 20도 소주를 좋아하는 소비자들에게 “뭐니뭐니해도 옛 것이 좋다”며 30도 소주를 자랑한다면 “물정 모른다”는 핀잔을 들을 뿐이다.
과거에 집착하다 낭패를 본다는 것은 이번 월드컵을 되새김해도 알 수 있다. 지난 98년 프랑스 월드컵에 처녀 출전해 4강 신화를 이뤄낸 크로아티아는 30대 초중반이 된 ‘역전의 노장들’이 그대로 나와, 약체 에콰도르와의 경기에서 고배를 마셨다. 패기 넘치는 젊은 선수들을 기용하지 않고 ‘노병들’에 의지하다 4강은 고사하고 16강 관문 앞에서 주저 않고 말았다. 4년 전 축배의 숙취에서 깨어나지 못한 탓이다.
불과 며칠 전에 진보세력의 승리로 마감한 한국 대통령선거도 고인 물이 쉽게 썩는다는 ‘자연 법칙’을 일깨운다. 변화의 물결을 미리 감지하고 대비하면 살고, 이를 애써 무시하면 도태될 수밖에 없다. 집권당인 민주당 소장파들이 당 해체를 포함한 소위 인적청산론에 불을 지피고 있다. 대선에선 이겼지만 당내 노장세력을 제거하지 않으면 개혁이 어렵다는 이유에서다.
보수당인 한나라당에도 비슷한 기류가 흐르고 있다. 늦었지만 대선에서의 패배를 거울삼아 당이 환골탈태하지 않으면 공멸한다는 위기감이 팽배해 있다. 진보, 보수 할 것 없이 변화를 거스를 수 없다는 현실인식을 하고 있다.
한인사회도 예외일 수 없다. 대선 이후 한인사회의 쇄신을 바라는 목소리가 높다. 구습을 답습하는 단체와 조직의 행태를 혁신해야 한다는 주장이 강하다. 한인사회의 세대교체론에 힘이 실리고 있는 것은 자연스럽다. 이민 올 때 지니고 온 한국에 대한 인식을 바꾸지 않으면 ‘과거를 먹고사는 사람’으로 몰릴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하지만 원칙과 현실의 간극을 살펴가면서 변화를 이끌어가야 한다. 한국 대선이 우리에게 미치는 파급효과는 부정할 수 없지만 한국사회와 미주한인사회의 상이점을 무시해서도 안 된다. 한국사회와 달리 한인사회는 세대간 지향점이 다르다. 한인사회는 구세대가 뿌리를 깊이 박고 있는데 반해 신세대는 주류사회에 자리 매김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다. 그래서 그 기반도 동일하지 않은 것이다.
또 대선은 한국인들에게는 직접적인 현상이지만 한인들에겐 한 다리 건넌 일이다. 그러므로 한국에서 일어날 세대교체의 속도를 그대로 따르려는 것은 섣부르다. 한국에서는 각계에 젊은이들이 약진하는 물리적인 형상이 두드러질 것이다.
반면 한인사회는 구세대의 자리를 메우기 위해 절차탁마한 신세대의 층이 엷어 구세대에게 무조건 물러나라고 외칠 수만은 없다. 그렇다고 지금 이대로 있으면 한인사회는 낙오자의 상심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변하되 점진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구세대는 변화에 능동적으로 임해야 한다. 젊은이들이 한인사회를 제대로 이어갈 수 있도록 독려하고 협조해야 한다. 봄에게 자리를 내주는 겨울이 불쌍하지 않고, 떠오를 태양을 위해 몸을 감추는 석양이 측은하지 않듯이 이민사회를 다진 구세대가 신세대에게 ‘자리’를 내준다고 해서 부끄러워 할 일이 아니다.
누려온 것들을 신세대에게 넘겨주는 구세대의 당당함이 보고 싶다. 서두르지 않으면서 차곡차곡 준비하는 신세대의 침착함이 요구된다. 세대교체의 바람을 한인사회 비약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박 봉 현 <편집위원>bongpark@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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