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달력이다. 2003년이 턱에 닿아 있다. 그런데도 세밑이 별로 실감나지 않는다. 날씨 탓인가. 아마 착각 때문인지 모른다. 인터넷으로 전해지는 세계. 그 사이버 공간이 몸담고 있는 현실로 혼동된 탓인가.
테러전쟁. 붉은 함성. 사망 여중생. 북한 핵. 그리고 한국대선….
9.11 사태가 언제 났더라. 벌써 작년의 일이라고. 월드컵 4강 신화는. 맞아, 지난 6월이었지. 그 신화에 한동안 빠져들었었지. 그리고 한국의 대선이다. 붉은 물결이 어른거린다. 그 이미지가 수만개 촛불로 바뀐다.
하루가 한 해 같았다. 아니, 한 해가 하루 같다는 말이 맞겠지. 결국은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가 탄생하는 건데 웬…. 그리고 보니 새삼 세월이 느껴진다. 또 한 해가 저물어 2002년도 역사속으로 저물고 있다는 사실이.
디지털 세대. 아날로그형 선거운동. 네티즌. 붉은 악마. 촛불시위. ‘대∼한민국’.
한국의 16대 대통령 선거와 관련해 쏟아지는 단어들이다. 한국정치의 주변부에 있던 노무현이라는 50대 정치인이 일으킨 ‘대사건의 의미’를 제대로 읽어내는데 필요한 키워드인 모양이다.
“유권층의 절반에 가까운 20∼30대 젊은층은 인터넷에 익숙한 디지털 세대인 데도 불구하고 한나라당은 아날로그형 선거운동으로 이들의 감성을 잡는 데 실패했다.” “노무현 후보의 승리는 한국 정치의 패러다임 전환을 의미한다.” “사회저변의 변화기류, 특히 젊은 층의 에너지를 읽어내 새로운 선거운동 방식으로 담아 낸 것이 노 후보 승리의 원동력이다.”
한마디로 한국 사회는 변했고 시대도 변했다는 방증이 바로 이번 선거의 결과라는 이야기다. 말하자면 정보화·민주화라는 거대한 역사적 흐름은 한국 사회를 그 바탕에서부터 변화를 가져오게 했고 이는 정치 영역에서도 구조적 변화를 불러왔다는 것이다.
그 주역이 바로 젊은 세대다. 이들이 하나가 돼 새로움을 갈구하자 구태의연한 정치는 설 자리를 잃었다는 풀이다. 노무현 후보의 승리는 따라서 이런 변화에의 순응이고 이는 시민의식의 승리로 보아도 된다는 평이다.
맞는 말 같다. 변화는 이미 붉은 함성 속에 잉태돼 있었다. 자존과 반(反)미로 표출된 젊은 세대의 저항의식, 반(反)기득권층 의식 속에서 그 변화는 뚜렷이 감지될 수 있었다. 이런 면에서 이번 선거는 디지털 세대 코리아 축제의 한마당이었다. ‘대∼한민국’이란 엇박자에 맞추어 한국민의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어 가는 축제의 장으로 볼 수도 있다.
밖에서 볼 때는 그러나 달리 비칠 수도 있다. ‘세계 속의 한국’-. 국제적 비전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더 그렇다는 생각이 든다. 상반되는 그 불편한 시각를 숨기지 않는 게 미국 언론이다. 9.11사태 이후 테러전체제에 돌입해 있는 미국. 세계화의 장본인인 미국은 한반도의 남쪽에서 일어난 사건을 긴장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노 후보는 진보를 대표하고 있다. 가장 중요한 건 한국이 미국으로부터 독립을 한다는 점이다.” 한국의 한 20대의 말을 직접 인용한 월 스트릿 저널의 보도다. 미국의 언론이 가장 신경을 쓰는 부문이 바로 양국의 동맹관계다.
북한의 침공위협이 없다는 게 한국 정부의 공식적 입장이 될 때 주한미군의 존재 이유는 없어진다. 미언론의 하나같은 지적이다. 또 노무현 정권탄생은 한미관계에 근본적 변화를 가져 올 것이라는 우려성 전망을 하고 있다.
또 이런 주장도 제기된다. 북한의 핵개발에도 불구하고 불감증에라도 걸린 양 안보위협을 전혀 느끼지 않는 한국이다. 이런 한국을 방어하기 위해 미군이 주둔 할 필요가 있느냐는 것. 주한미군에 통행금지령이 내려진 한국의 대선 분위기와 관련해 나오고 있는 신경질적 반응이다.
사회변화는 불가피하게 사회갈등을 수반한다. 문제는 갈등을 해소할 정치적 역랑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노 당선자를 바라보는 한국의 중·노년 세대의 시각에는 여전히 불안감이 깔려 있다. 단순한 세대차가 아니다. 정서의 문제도 아니다. 이념·역사관이 현격히 다른 데 따른 불안감이다. 대선서 표출된 한국사회의 균열 양상이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해 보여 하는 말이다.
달력을 열고보니 새해 원단(元旦)의 광경이다. 한국의 정취가 흠뻑 묻어 있다. 여기가 어딘가. 몸담고 있는 공간은 미국하고, 또 LA다. 코리아 축제. 그 현장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다.
미국은 무엇인가. 갑자기 떠오르는 뚱단지 같은 생각이다. ‘미국은 국가이자, 문명이다’-. 누가 그런 소릴 했더라. 그러면 코리안-아메리칸은. 글쎄, 내년에 가서 생각해야지. 너무 복잡하니까…. 한 해는 이래서 또 간다.
옥 세 철<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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