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회창, 노무현 후보는 때깔 좋은 공약들을 내걸고 있지만 정작 이들을 뜯어보면 구체성이 미흡하고 실현 가능성에도 썩 신뢰가 가지는 않는다. 대선 때마다 반복되던 일종의 ‘구두선’이란 생각 때문이다. 지금이 바로 두루뭉실한 교포정책으로는 곤란하다는 점을 입력시킬 시점이다.
국내법과 여론 ‘방패’삼아 전향적 정책 공약 꺼려
‘한민족 네트웍’ 구상은 때되면 나오는 단골 메뉴
21세기 지도자는 교포역량 뿜어낼 비전 제시해야
동부지역에 사는 미시민권자 한인(17)은 얼마 전 한국에 가기 위해 여권을 들고 관할 한국 총영사관에 문의했다.
영사관 담당자는 호적신고를 하지 않았지만 부모가 한국인이므로 혈통주의에 의거, 한국인으로 간주돼 병역법이 적용된다고 설명했다. 그러니 먼저 한국에 출생신고를 한 뒤 한국국적 포기 절차를 밟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시키는 대로하면 되겠지만 당장 화급한 용무가 있는 경우에는 여간 짜증스런 상황이 아니다.
한편 미국에서 출생한 뒤 한국 호적에도 올려 이중국적을 갖게 된 경우 미국에서 계속 거주했다면 병역의무를 면제받을 수 있다는 한국 대법원의 첫 판결이 최근 나왔지만, 미국서 혼자 산 경우에는 면제대상이 되지 않는 등 아직도 까탈스런 규정이 곳곳에 있다.
국내에서도 병역문제는 ‘뜨거운 감자’이니 만큼 후보들이 섣부른 발언이나 공약을 하기 어렵다는 점은 이해가 가지만 교포들의 권익증진을 거론하면서 이 이슈에 대해 우물우물하면서 다른 거대담론에 대한 지지를 얻어내려 한다면 당당한 태도가 아니다.
교포의 권익신장은 이중국적 문제와 궤를 같이 한다. 미국은 이중국적을 허용하지만 한국이 그렇지 못하다. 이 후보는 ‘다른 국내법과의 조화와 국민적 합의’를 선결과제로 들었고, 노 후보는 ‘악용에 따른 부작용’을 염려했다. 이러하니 당선자가 이중국적 문제를 적극적으로 개진할 의지를 보일지 의문이다.
과거 대선 후보들은 저마다 유세에서 600만 교포의 역량을 결집하기 위해 이중국적 문제를 전향적으로 검토하겠다고 말만했을 뿐 당선 후에는 “언제 그랬더냐”는 식이었다. 납세 및 국방의 의무가 걸림돌이 돼 온 게 사실이다. 이는 행정적인 장애보다는 국민정서가 이를 수락할 정도로 열려있지 않은데 기인 했다.
교포들은 단물만 빼먹고 국방의무 등은 교묘히 빠져나가려 한다는 부정적인 인식이 깔려 있으니 입법을 추진해야 할 국회의원들이 지역 주민들의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 없는 것도 수긍이 간다. 하지만 차기 대통령은 이 이슈를 대승적 차원에서 검토해야 할 것이다.
현재 약 40개국이 이중국적 또는 이에 준하는 정책을 실시하고 있으며 시행국가 수도 증가추세에 있다. 대만은 지난 70년대 초 이중국적을 실시하면서 재산권 행사 등에 있어서 내국인과 동일한 권리를 부여해 해외 화교들이 대만에 투자를 늘렸고 결국 대만 경제발전에 밑거름이 됐다. 교포정책 전담 부서를 독립적으로 운영하며 장관급을 책임자로 맡길 정도로 교포정책에 열과 성의를 쏟은 결실이다.
멕시코도 이중국적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다. 멕시코 출신 미국인들이 본국의 가족 친지에게 보내는 돈이 연간 40억달러에 달한다니 그럴 만도 하다. 이스라엘도 이중국적 정책으로 짭짤한 재미를 보고 있다고 한다. “1,600만 명의 미국인이 이중국적자”라는 이민연구센터의 보고서를 대선 후보들이 한번쯤 훑어보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중국적을 악용해 병역을 기피하는 등의 부도덕한 행위가 우려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해외교포의 역량을 십분 활용한다는 차원에서 사안을 다루어야 본국인은 물론 교포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다.
이 후보는 “국제법, 국내법 및 거주국의 법과 제도가 허용하는 테두리 안에서 지원”을 약속했고, 노 후보는 “재외동포 출입국과 법적 지위에 관한 법률을 내년에 개정할 것”이라고 하지만 아직은 명료하지 않은 상태이다.
이중국적은 아니더라도 교포들의 권익과 활동을 보장한다는 측면에서 현존하는 재외동포재단을 교민청으로 승격하는 방안에 대해서도 두 후보는 조심스런 반응을 보이고 있다. 이 후보는 정부조직을 개편하는 일이니 여론 수렴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했고, 노 후보는 새로운 조직보다는 정부의 교포정책 실천 의지에 무게를 둠으로써 ‘책임지지 못할 약속’을 부담스러워했다. 기본적으로 교포들을 위해 예산을 대거 투입하는 일에 여론이 우호적이지 않을 것이란 배경을 깔고 있는 것이다.
두 후보는 각자 주도적으로 교포정책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한편으로는 교포정책에 대한 국내 여론에 촉각을 세우고 다른 한편으로는 교포들에게 미움을 사지 않는 범위 내에서 그저 ‘듣기 좋은 연주’를 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경제적으로 세계화됐다고 하지만 한국인의 의식은 아직 이에 걸맞지 않다는 평가가 맞는다면 탁 트인 교포정책은 당분간 기대난망일 것이다.
두 후보가 이중언어 교육 등 현지 정착 지원 활성화, 영사 서비스 강화, 경제 및 한민족 네트웍 구축, 2세와 본국의 유대강화 등에는 공감하고 가시적인 성과를 거둘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은 반가운 일이다. 또 교포가 ‘민족의 자산’이니 ‘통일의 가교역’이니 하는 말도 상투적이긴 해도 거슬리지는 않는다.
그리고 좁아지는 지구촌이라 한국인의 평균의식도 점차 포용적인 쪽으로 기울 것이니 교포정책 수립에 자신감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한 표가 아쉬운 후보들로서는 투표권 없는 교포들을 무서워하기보다는 국내 유권자들을 두려워하는 게 당연지사라 하겠지만 21세기를 이끌 한국의 지도자라면 여론에 귀기울이면서도 필요할 땐 여론을 이끌어 가는 능력을 갖춰야 한다고 본다.
차기 대통령 당선자는 교포를 잘 활용하는 게 결국 교포사회와 한국이 모두 잘되는 ‘윈-윈 전략’이란 믿음 아래서 정책을 세우고 집행해 나갔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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