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원씨는 현직 대통령 비서실장이다. 김대중 정권의 명실상부한 2인자로 부상하는데 성공한 입지전적 인물이다. 장세동씨는 전두환 정권 당시 경호실장과 안기부장을 지내며 막강한 파워를 과시한 흘러간 인물이다.
두 사람은 성장 배경이 전혀 다른 이질적 요소를 많이 갖고 있다. 장씨는 80년대 초 육군대령 신분으로 전두환씨 등이 주도한 신군부 쿠데타를 성공시킨 무골이다. 정권이 막을 내린 후 그는 주군을 위해 2번이나 감옥엘 가는 고난을 겪었다. 그러면서도 전두환씨에 대한 충성심을 과시해 일부로부터 ‘의리의 사나이’라는 좋은 평가도 들었다.
그런 그가 이번 대통령 선거에 ‘단기필마’로 출사표를 던졌다. 주변이 의아하게 생각한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이내 전두환씨의 ‘모종 사주설’이 제기된 것 또한 두 사람의 관계에서 보자면 매우 자연스런 추측이다. 한데 전씨는 짐짓 대노한 표정을 짓고 이를 부인했다. “장세동이란 놈이 이젠 나이가 들었다고 내 말도 안 듣습니다.” 하지만 모두들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렇다면 장세동이 반역을 했단 말인가? 뭔가 냄새가 나는 구만…” 야당 쪽에선 대놓고 ‘공작설’을 제기한다. 보수세력의 결집을 호소하면서 출마한 장세동이 이회창 지지표를 갉아먹을 건 뻔한데 그 배후가 누구이겠는가?”
그렇다면 DJ와 전두환씨의 관계가 관심을 끌 수밖에 없다. 과거 기록으로 보자면 전씨는 가해자고 DJ는 피해자다. 광주 내란음모죄로 전두환 정권은 DJ를 교수형에 처하려했다. 당시 백악관을 장악한 레이건 대통령의 구명운동이 없었다면 DJ는 생명조차 부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한데 그 뒤 전씨는 DJ와 호남에 남다른 호의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아마도 심리적 부담 때문이기도 했고, 또 YS가 자신을 감옥에 보낸 데 대한 반감도 작용했을 것이다. 그래선지 전씨는 DJ가 집권한 뒤 청와대서 오라면 제백사하고 얼굴을 내밀었다. 거기다가 햇볕정책 등 DJ의 여러 정책들을 찬양하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일부에선 법원 판결을 받은 부정 재산 환수금(2,300억원) 때문에 DJ 눈치를 보는 게 아니냐고 비아냥댔다.
사정이 이렇고 보면 장세동씨가 느닷없이, 그것도 당선 가능성이 제로 퍼센트에다 같은 보수세력인 이회창씨 쪽에 불리함을 알면서 출사표를 던진 배경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것은 당연하다. 이번 대선은 대략 50만에서 70만표 차로 당락이 결정될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만약 장씨가 5공화국과 군사문화를 동경하는 세력들을 규합해 25만표 이상을 얻는다면, 그것은 당락을 가름하는 요인이 될 수도 있다. 따라서 노무현씨 쪽에는 절대적으로 유리한 국면이다. 물론 민주노동당의 권영길씨가 노무현 표를 잠식할 우려도 충분히 있다. 바로 이 부분을 상쇄할 묘안으로 장씨의 출마가 강행됐다는 해석이다.
이 글머리에서 지적했듯이 장세동씨와 박지원씨는 이질적인 인물이다. 박씨는 장씨와 달리 미국 이민자로서 재산을 쌓은 뒤 한국 정계에 진출해 대성공을 거둔 처세가다. 두 사람이 전혀 다른 길을 걸었지만 한가지 측면에선 서로를 빼 닮았다.
‘주군’을 위해선 못할 일이 없다는 점이다. 머리가 조직적이고 비상한데다 언변이 좋다는 개인적 역량도 같다. 정보를 독점해 집권자에게 올라가는 보고를 차단하고 ‘독대’를 거쳐 후속 대책까지 진언하는 용의주도함에서도 두 사람은 비슷하다.
집권자의 총애를 받는 가장 큰 이유는 정치적 공격을 몸으로 막아내는 ‘충직함’에 있다. 박씨가 최악의 경우 정권 퇴진 후 장씨처럼 옥살이도 마다하지 않을 만큼 충성심을 발휘할까? 일부에선 박씨는 좀 다르다고 말하는 이가 많다.
야당에선 장씨와 박씨가 같은 고향 사람들이라는 점도 주목하고 있다. 고흥과 진도는 지척지간이다. 이런 연결은 박씨가 이번 대선에 깊숙이 관계하고 있다는 전제 하에서 나온 공세다. 민주당 경선 때 호남에서 노무현 바람을 일으키고, 정몽준씨와의 단일후보 싸움에서도 노씨의 손이 올라간 배경에는 DJ와 박씨의 “막후 음모”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공격했다. 이제는 탈당을 했지만 한 울타리에 있던 이인제씨도 청와대 음모설을 맹공하며 경선 사퇴를 선언하기까지 했다.
영어의 ‘피시’(Fish)가 동사로 쓰이면 ‘냄새가 난다’는 뜻이다. 확증은 없어도 심증이 갈 때 이 말을 쓴다. 노무현씨의 급부상과 장세동씨의 출마를 둘러싸고 한국 정가에 나도는 이런 저런 이야기들이 바로 ‘냄새가 난다’는 데 근거한 주장들이다.
이제 한국의 대권 싸움은 ‘이회창 대 반이회창’의 거대한 양자 구도로 고착됐다. 이념적으로는 보수 대 좌파의 한판 대결이다.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간에도 현격한 지지 쏠림이 나타나고 있다. 지역감정이 여전히 꿈틀대고 있음은 5년 전과 다르지 않다. 영남 대 호남의 양분 구도다. 정치권도, 유권자도 별로 변한 게 없다는 불행한 사태 속에서 역사는 굴러가고 있다. 그 거대한 고비가 불과 보름 앞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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