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장을 정리하다가 영문 책자 속에 섞여 눈에 띄지 않았던 심훈의 소설 ‘상록수’를 발견하였다. 수십년 전 한국을 떠나올 때 기념품으로 짐 보따리에 넣어 왔던 ‘상록수’를 보자 우연히 길에서 옛적 친구를 다시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
한국사람들이 글을 오른쪽에서부터 시작하여 위아래로 읽느냐고 호기심에 찬 질문을 받을 때마다 옛날 책을 한 권쯤 가지고 있으면서 보여주면 좋을 걸하며 아쉬워하곤 하였다. 요즈음에는 보기 힘든, 오른쪽에서 시작하여 위로부터 아래로 읽어 내려가는 이 책이 수십번의 이사에도 불구하고 이삿짐 보따리 속에 끼여 나를 따라 다녔구나 하고 생각하니 신기하기만 하였다. 누렇게 퇴색된 책을 이리 저리 들치다가 정리하던 책들을 발치에 밀어 놓고 아예 다리를 뻗고 앉아 소설을 읽기 시작하였다.
’상록수’를 오랜만에 다시 읽으면서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친구의 정겨운 목소리를 듣는 것 같았다. 참으로 오랜만에 들어보는 옛적 말이다. 갓난이가 "선생님, 뒷간에 가고 싶어요" 하는 표현이 어찌나 재미있는지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소설 속의 여자 주인공인 채영신이 "그런 게 아니야요" 하며 동료 남학생들을 훈계하는 대목이 있다. 간단 명료하게, 야무지게 말하는 그녀의 말투가 최근에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읽던 책을 놓고 어디서 들었을까하고 기억을 더듬었다. 얼마 전 부산에서 있었던 아시안 게임 때 이북에서 온 여성 응원단들의 말투와 비슷하였다. 기자들의 질문에 대답하는 그녀들의 짤막하고 또렷한 말투가 소설 속의 채영신의 말투처럼 너스레가 없었다. 남한 사람들의 말을 잘 못 알아듣겠다고 말하는 그녀들의 코멘트를 들으면서 남쪽 사람들의 생활방식이 서양화된 것만큼이나 말도 변한 것을 보았다.
’상록수’를 읽으면서 인터넷 세대가 사용하는 한국말이 참으로 많이 변하였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철자법도 일부러 틀리게 그리고 말의 표현도 일부러 틀리게 함으로써 관심을 끌려고 하는 것 같다. "그게 아니야요"라는 표현이 인터넷에서는 "그거 아~니~ 다~~아 아 ㅇㅇㅇㅇ" 라고 표현되고 있다.
아프리카에서 만난 한국 학생선교대원들을 중심으로 시작한 인터넷 카페에 가끔 들어갈 기회가 있는데, 처음 몇 번은 인터넷에 올린 채팅식의 한국말이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인터넷에 입력된 내용들이 잘 이해가 되질 않아 마치 외국말을 해석하는 기분으로 두서너 번씩 읽어야 하였다. 한두 번은 신선한 맛이 있었는데, 화면에 쓰여진 한글 아닌 한글을 보면서 마치 깨어지고 멍든 한글을 보는 것 같아 방문을 그만 두었다.
새로운 것이 옛것을 밀어내는 것이라고 애써 이해하려고 하면서도 눈앞에서 한글이 파괴되는 것을 보는 것 같아 아쉬운 생각이 든다. 말이란 살아있는 사람의 입을 통하여 나오는 이상 유동성을 피할 수 없고 그래서 시대에 따라 변화되는 사실을 인정하지만 인터넷에서 오용되고 있는 한글을 볼 때마다 환경보호 운동하듯 우리말 보호운동이 일어났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을 한다.
영어 섞인 남한 사람들의 말이 낯설어 한국말을 못 알아듣겠다는 북한 여성 응원단원의 말을 생각하며 그녀들이 인터넷 카페 같은 데서 사용되고 있는 글을 접한다면 한글이라고 알아보기나 할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 역시 인터넷에서 만난 한글이 서먹하기만 하다. "세대차이일까? 문화차이일까?" 하며 서먹함을 설명하려는 와중에 우연히 책장을 정리하다가 다시 읽게된 심훈의 ‘상록수’ 속에서 읽은 한글이 옛친구처럼 반갑다.
김현덕 샌프란시스코 주립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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