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권을 취득한 한인들이 가장 성가셔 하는 일 가운데 하나가 배심원 소환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가능하다면 뒷돈을 내고라도 피하고 싶은 게 배심원 서비스다.
지난달 내게도 귀화시민으로서의 첫 ‘신고식’을 치르라는 배심원 소환장이 날아들 었다.
미국생활 10여년만에 ‘늦깎이’ 귀화시민이 된 내게 법무부의 출두명령은 이제 겨우 안면을 튼 이웃의 청첩보다 훨씬 귀찮고 성가시게 느껴졌다. 어차피 ‘참석’보다는 ‘납부’쪽에 무게가 실린 청첩장이야 제3자를 통해 들려보내는 부조봉투로 상쇄가 가능하나 국가기관이 발송한 소환장은 얼렁뚱땅 넘길 방도가 없다. 최근 들어 벌칙조항이 강화되는 바람에 소환장을 받고도 딴청을 하다간 1,500달러의 벌금까지 물게 된다.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한인 시민권자들이 배심원 서비스를 달가워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시간적 제약’ 때문일 것이다. 자영업자들은 자영업자대로, 봉급생활자는 봉급생활자대로 빡빡하게 돌아가는 일상에서 표나지 않게 시간을 빼내기란 불가능에 가 깝다.
시간이 곧 돈인 자영업자들의 경우는 두말할 나위 없지만 봉급생활자의 처지도 영세 자영업자에 비해 나을 바 없다.
워낙 규모가 영세하다 보니 배심원 호출을 받은 직원의 일당을 봉급에서 제하는 회사가 수두룩하다. 설사 그렇지 않더라도 동료들에게 일을 떠넘길 수밖에 없는 당사자들은 무슨 죄라도 지은 듯 눈치가 보이게 마련이다. 한인 커뮤니티의 전반적 분위기가 배심원 서비스에 친화적이 못되는 셈이다.
이런 상황 하에서의 최선책은, 일단 호출에 응한 후 배심원 선정과정에서 요령껏 탈락하는 것이다. 쏟아지는 배심원 후보들의 비웃음 섞인 눈총과 판사의 비아냥을 감내해 가며 시종일관 “미 노 잉글리시”(Me no English!)로 밀어붙이거나, 배심원으로서의 공정성을 유지할 수 없는 이유를 ‘조작’해 ‘익스큐즈’(excuse)를 받는 게 ‘장땡’이다.
나 역시 그런 생각을 갖고 LA 형사법원 배심원 대기실을 찾아 들어갔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검사의 요청에 따라 ‘탈락의 기쁨’을 맛보았다. 하지만 법원을 나서는 기분은 그리 개운치만은 않았다.
배심원 집합실에 모인 200여 대기자들의 대부분은 영어가 어눌한 이민자들이었다. 기나긴 대기시간 중에 자연스레 친해진 몇몇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어 보니 그들도 배심원 서비스를 짜증스러워했다. 하지만 일단 배심원 선정작업이 시작되자 익스큐즈를 받기 위해 반벙어리 시늉을 한다든지 장황하게 불가사유를 제시하는 후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들을 지켜보며 바로 이곳이야말로 귀화시민의 자격을 검증 받는 자리라는 생각을 했다.
따지고 보면 배심원은 하고 싶다고 해서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배심원석에 앉으려면 해당 재판의 피고와 유사한 범죄를 저지른 전과기록이 없어야 하고, 각계각층에 속한 생활인의 건강한 상식(common sense)을 재판에 반영한다는 배심원 제도의 취지에 맞게 기본적인 양식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물론 재판내용을 충분히 이해하고 자신의 견해를 표현할 수 있는 정도의 언어능력은 필수다. 한마디로 배심원의 자격 기준은 양식 있는 미국의 보통 시민인 것이다. 게다가 이런 자격들을 다 갖추었다 해도 검사나 판사가 딱지를 놓으면 그것으로 끝이다.
솔직히 나를 비롯한 한인 1세들 가운데 태반은 구태여 요령을 피우지 않아도 배심원에 뽑힐 확률보다는 딱지 맞을 가능성이 훨씬 높다. 이민 1세들 중 영어를 제대로 구사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소수파’에 속하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단언컨대 한인 1세들 가운데 배심원 ‘경력’을 지닌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우리도 이젠 100년의 경륜을 쌓은 이민집단이다. 커뮤니티 전체가 배심원 기준을 충족시키는 시민들로 넘쳐날 때가 되지 않았을까.
이강규<국제부 부장>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