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학기술원(KAIST) 석사 출신인 K(25)씨는 며칠 전 큐레이터로 일해온 미술관에서 ‘자리가 없어졌다’는 통보를 받았다.
디자인 전공인 그는 5개월 전 한달 40만원을 받기로 하고 그곳에 취업했다. 지금 그는 유학을 생각하지만, ‘가방 끈이 길면 취업하기가 더 어렵다’는 주위 만류로 고민하고 있다.
독일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고 얼마 전 돌아온 40대의 또 다른 K씨. 직업인으로서 그가 선택한 것은 ‘서울의 택시 운전사’다. 대학강단에 서고 싶지만 강사료는 생활비 대기에도 모자라고, 자리도 나지 않는다.
반도체 연구로 외국학술지에 논문까지 실려 20대 박사가 된 M(31)씨는 그나마 나은 경우다. 유명 반도체 기업에서 일하고 있는 그의 직급은 대리. 직급도 직급이지만 일반 직원들은 ‘박사’라며 그를 멀리하고, 주어진 일은 단순한데다, 연봉도 생각보다 박하다.
요즘 그는 학원에서 주말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사설학원 1번지’ 대치동을 비롯해 서울 강남 학원가에 가면 M씨 같은 석ㆍ박사 출신 해외 유학파를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다.
‘해외인재를 잡겠다’며 스카웃(채용) 출장에 열을 올리는 대기업 간부들의 모습은 유학생들에게 소리만 요란한 호들갑으로 비쳐진다.
미국 내 톱10에 드는 시카고대 MBA(경영학석사)과정 졸업예정인 L(30)씨는 지난 여름방학 때 ‘인재’로 선발돼 국내기업에서 인턴사원으로 일했지만 끝내 취업 보장을 받지 못했다.
L씨와 같은 미국 유명대학의 MBA출신은 몇 년 전만 해도 잘 나가는 ‘귀한 몸’이었다. 그러나 벤처 거품이 빠지면서 L씨가 다니는 학교의 한 학년에 20명 가량이 되는 한국 유학생 대부분이 비슷한 처지에 놓였다.
미국 취업시장은 얼어 붙었고, 아시아 시장은 중국 학생들이 장악해 결국 이들이 갈 곳은 한국뿐이지만 역시 ‘오라’는 기업이 없다.
1980년대 후반, 30만명의 대학 졸업자가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심각한 사회문제가 된 적이 있다. 20년이 지난 지금 고학력층에서 최악의 취업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석ㆍ박사를 비롯해 공인회계사 등 이른바 전문가 집단까지 이에 휘말려 있다. 대기업에서 박사 대리, 변호사 대리가 흔해졌고, 공인회계사는 합격자중 절반 가량만 실무수습 기회가 주어진다.
한국학술진흥재단에 따르면 한해 평균 8,000명 이상의 박사가 배출되지만, 대학과 연구소가 수용할 수 있는 박사는 연 3,000여명 수준이다.
고학력자 홍수사태가 벌어지자 일찌감치 방향을 바꿔 취업전선에 뛰어드는 학생이 늘어, 올해도 서울대 박사과정 전형에 절반 이상의 학과에서 미달사태가 빚어졌다.
‘고학력자들이 눈높이를 낮추어 하향 지원하면 되지 않는냐’는 지적도 있지만, 당사자들에게는 그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취업이 안돼 석사공부한 것이 아니냐’는 기업 인사 담당자들의 말속에서 석사 출신자들은 ‘도피성 학업자’로 전락해 있다. 이런 시각이 기업이 고학력자를 기피하는 현상을 심화시키고 있다.
학위에 걸맞은 대우 문제로 부담이 크고 이직률마저 높은데다, 학식이 직접적으로 업무 및 수익성과 연결되기 어렵다는 것 등이 기업들이 지적하는 고학력자에 대한 불만이다.
현대건설은 최근 각 대학에 보낸 사원채용 공문에서 추천학생 대상에 석사를 제외해 달라고 주문했고, 현대모비스는 지원자중 박사를, LG건설은 공인회계사를 모두 탈락시켰다.
최근 원서를 마감한 KOTRA에는 22명 모집에 대학원 졸업자 370명을 포함, 2,300여명이 응시했지만 KOTRA 측은 “학력은 중요하지 않다”며 학력우대는 없다고 말했다.
리쿠르트 이정주(46)사장은 “몇 년 전 환란 당시 취업을 미루며 유학 등 학업을 계속한 사람들이 쏟아져 나와 고학력 취업병목 현상을 일으키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사장은 “수요자(기업) 우위 시장인 노동시장에서 공급자인 대학이 기업의 니즈(needs)를 알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LG경제연구원 장성근 수석연구원은 “기업들이 주력사업을 찾지 못해 현금만 쌓아두고 투자를 미루면서 고학력자들이 갈 곳이 없게 됐다”며 “인력이 자산이 아닌 비용 개념으로 바뀌고, 비정규시장 내 인력공급이 포화상태인 것도 고학력 실업난을 부추기는 요인”이라고 지적했다.
이태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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