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그랬을까’-. 계속 맴도는 질문이다. “우리는 핵프로그램을 갖고 있다, 어쩔래?” 어렵사리 이루어진 미국 특사의 방문을 맞아 북한이 내뱉은 폭탄선언이다.
마치 ‘빅 원’이라도 온 것 같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10여년이 걸려 겨우 이룩된 핵질서가 이 한마디로 무너졌기 때문이다. 북한은 도대체 왜, 아니 무슨 생각으로 이런 엄청난 사안을 시인하고 나섰을까.
여러 가지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북한의 통미봉남(通美封南) 정책에는 변함이 없다는 증거다’-. 눈이 끌리는 주장이다. 이 정책은 남한을 ‘괴뢰정권’ 정도로 보는 데서 출발한다. 남한은 결코 진정한 협상 파트너가 될 수 없다는 개념이 깔려 있는 것이다. 그래서 거래는 미국하고 하는 것이지 남한과는 상대 할 필요가 없다는 논리다.
김정일은 고이즈미와의 회담에서 일본인 납치 사실을 순순히 시인했다. 또 사과까지 했다. 이 대목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통미봉남’의 변형, 즉 ‘통일봉남(通日封南)’정책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거래는 일본과 하는 것이지 남한 따위야…’ 하는 발상이 묻어 있는 듯 해서다.
남북정상회담이 열렸다. 이후 숱하게 남북회담이 열렸다. 그런데 납북자 문제는 제대로 거론된적이 없다. 그래서 하는 말이다.
그 연장선상에서 보면 오매불망 ‘햇볕’만 외쳐온 DJ도 평양측은 단지 공작대상으로만 대해 왔다는 이야기가 된다. 북한의 폭탄선언의 가장 큰 피해자가 DJ이고 ‘햇볕’이어서 하는 말이다.
퍼주면 상대가 감동한다. 햇볕정책의 이상이자, 기대다. 햇볕정책에 북한은 그러나 일정한 선을 긋고 대했다. 감동은 먹지 않았다. 우선 퍼주니 받아 먹자다. 낮은 단계의 교류 정도는 허용하고. 그러면서 핵문제 등 한민족 전체의 사활이 걸린 핵심사안은 ‘남한 따위’와 결코 협상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해온 것이다.
“이번 사태는 북의 ‘통미봉남’정책을 재확인해 주었다. 또 이중전략을 구사하는 북한의 실체는 조금도 변함이 없다.” 분명히 옳은 지적이다.
다른 측면도 있는 것 같다. 북한의 폭탄발언은 더 이상 물러날 수 없는 상황에서 나온 것이라는 지적이 그것이다. 뭐랄까. 조요경(照妖鏡)에 비추어져 정체가 드러나자 내뱉은 비명이라고 할까, 그런 측면도 있다는 이야기다.
다른 말로 하면 부시 행정부의 강공 드라이브가 먹혀든 결과라는 것이다. 물론 매파의 주장이다. 그렇지만 상당히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결과론이지만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한 부시 행정부의 정책이 틀리지 않았음이 이번 사태로 증명됐기 때문이다.
적지 않은 관측통들은 이와 함께 김정일 실각 가능성까지 조심스럽게 점치고 있다. 이번 사태로 북한은 사면초가(四面楚歌)의 상황을 맞아서다. 한마디로 최악의 실패작이라는 진단이다.
“(김정일이 시도한) 일련의 조치들은 개혁의 시작이라기 보다는 붕괴를 알리는 균열로 보아야 할 것이다.” 최근 북한을 방문하고 돌아온 한 서방기자의 말이다. 북한 사회를 짓누르고 있는 것은 오직 불안과 불확실성으로 지난 7월 경제개혁 조치를 취한 후 상황은 더 악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경제개혁은 실패로 돌아갔다. 일본인 납치 사실을 시인한 ‘고백 외교’도 실패다. 반(反)북한 여론의 역풍을 맞아서다. 신의주 경제특구 계획은 망신으로 끝났다. ‘경애하는 지도자 김정일 동지’의 절친한 친구인 양빈을 중국 당국은 파렴치범으로 체포했다. 실패의 연속이다.
이와 관련해 관측통들이 주목하는 건 북한 엘리트층의 동향이다. 경제는 파탄이다. 혈맹이라는 중국이 김정일에게 보인 태도는 그야말로 쇼크다. 그런 와중에 핵개발 시인 폭탄선언이 나왔다. 미국, 일본은 물론이고 혈맹인 중국조차 김정일이 치켜든 핵개발 카드에 분노를 삭이고 있다.
이들은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중국과의 커넥션이 있기 때문이다. 절대권력에는 책임도 따른다. 그러나 김정일이 보여온 행보는 그런데….
이쯤에서 한 번 이런 생각을 해본다. “한국에는 새 정권이 들어섰다. ‘햇볕’의 미몽(迷夢)에서 깨어난 것이다. 2003년인가, 2004년의 시점이다. 핵을 둘러싼 한반도의 기류가 심상치 않다. 그 와중에 북한 인민은 총체적 파탄상황에 직면한다. 봉쇄정책 탓이다. 공멸이냐, 아니면…. 북한의 엘리트들은 모종의 결심을 굳힌다. 한 사람을 제거함으로써 전체 인민이 사는 길을 모색한다. 수령절대주의 망령 제거 작업이다.”
차기 한국정부의 주된 업무는 어쩌면 일종의 호스피스 사역이 되지 않을까. 변종체제의 안락사를 돕고 북한 인민을 구제하는 업무 말이다.
옥 세 철<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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