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에 며칠 있어 본 사람이면 북한이 엉뚱한 착각에 사로잡혀 있는 나라라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세계에서 미국과 맞서 당당하게 싸우는 나라가 어디 있느냐. 소련도 무릎 꿇었고 동구는 미국의 앞잡이가 되었으며 중국도 미국 눈치 살피기에 바쁘다. 중동은 그 풍부한 석유자원을 가지고도 미국에게 대들지도 못한다. 미국과 한판 싸움을 불사하는 나라는 이 세상에서 북한밖에 없다. 얼마나 주체성 있는 나라인가. 그래서 김정일 장군이 위대한 것이다. 미국에 머리 굽히기를 거절하고 있으며 오히려 미국 쪽에서 우리 눈치만 보며 머리를 굽히고 있다.”
이상이 북한 안내요원들의 주장이다. 판문점에서 인민군 장교의 설명을 들어봐도 하나 같이 논리가 똑같다. 그러면서 마지막에 으레 하는 소리가 “우리 공화국(북한)은 미국X들과 한번 붙을 각오가 되어 있습네다. 우릴 깔봤다가는 큰코다칠 거라구…”라며 언성을 높인다.
이 사람들은 타고나면서부터 싸움닭인가. 왜 싸움 이야기만 나오면 기가 오르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인민들이 제대로 먹고살지도 못하는 형편에 곧 죽어도 세계 최강국인 미국과 맞서는 것으로 자위하고 있으니 착각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미국의 눈으로 보면 북한은 국제무대의 문제아에 불과한데 당사자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있다.
북한이 핵을 포기할까. 94년 제네바 협정도 어기고 핵을 개발한 정도의 두꺼운 얼굴을 가진 나라라면 앞으로 어떤 협정이 맺어져도 뒤로는 핵개발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핵은 북한에 있어 외부에 대한 위협의 수단이 아니라 생존 자체의 필수조건이기 때문이다. 핵 없는 북한은 이빨 없는 사자다. 이빨 뺀 사자가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는 언젠가 본 란에서 언급한 적이 있지만 이 이솝우화를 다시 한번 상기할 필요가 있다.
산나물 캐러 온 미모의 시골 처녀에게 홀딱 반한 사자가 처녀의 아버지를 찾아가 딸을 달라고 청했다. 장인 될 농부는 사자의 인상이 너무 험해서 사위 삼기에는 좀 뭐 하니 이빨과 발톱을 빼고 오면 딸을 주겠노라고 말한다. 사자가 이빨과 발톱을 빼고 찾아갔더니 농부는 몽둥이로 사자를 두들겨 패며 “네가 어디 감히 내 딸을…” 하더라는 것이다.
이빨과 발톱 없는 사자는 이미 사자가 아니다. 북한은 이빨과 힘의 함수관계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지난 10여년 동안 국제무대에서 펴온 북한 외교는 핵외교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핵개발을 줄곧 협상카드로 써 왔다. 돈이 있나, 석유가 있나, 관광자원이 있나. 털면 먼지밖에 안 나는 것이 북한의 실상이다. 가진 것이라고는 유일하게 핵뿐이다. 옵션이 없는 상태다.
북한이 계속 핵문제를 가지고 말썽부리면 미국도 참는데 한계에 도달할 것이다. 이라크 문제를 해결하면 다음은 북한이다. “핵을 포기하라. 그러면 원조하겠다” “원조부터 해달라. 그러면 핵을 포기하겠다”는 두 주장이 끊임없이 되풀이되다가 어느 날 미국이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며 공격준비에 나설지도 모른다. 북한은 핵을 협상 카드로 쓰려고 깐죽거리는데 미국이 이를 오판하여 선제 공격하는 것이 문제다.
미국이 북한 공격준비 운운하는 날에는 한국에서 반미 데모가 일어날 것이고 이렇게 되면 미국에 살고 있는 한인들이 마음고생을 하게 된다. 미국 시민권 가진 이라크인들이 요즘 미국에서 겪고 있는 심리적 고통을 남의 일로 여길 일이 아니다.
북한의 핵개발은 미국과 한국만의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재미 한인사회에도 심각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골칫덩어리다.
이철주필 chullee@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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