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인 장소나 시간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LA 한인들의 흔한 주말모임에 불과하니까. 모인 사람들도 그렇다. 다 50줄이 넘었다. 이민 와서 이런 저런 모양으로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신변잡사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아이들 이야기. 돈버는 이야기. 교회 이야기 등이다. 결국 화제는 정치로 모아진다. 그 지겨운 한국정치 말이다.
“총리가 이번에는 인준되긴 된 건가. 아니 그래야 서너 달인데 총리는 해 뭐해. 이회창이가 대통령 되는 거지? 그렇다고 그냥 정권을 내놓겠어, 변수가 있는 거 아닐까. 정몽준이가 되지 말라는 법도 없겠지.”
“아들을 둘씩 감옥에 보냈으니 더 볼 것 없잖아…. YS는 안 해먹었나. 전·노는 어떻고… 썩은 정권이야. 맞아. …그렇지만 이 점만은 인정해야 할 걸. DJ는 민족화합을 위해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킨 대통령이란 점 말이야.”
DJ 평가에서 이야기가 갈린다. 역대 정권이 썩기는 마찬가지인데 DJ는 그래도 통일을 위해 무엇인가를 하려고 했지 않으냐는 동정론이다. 이야기는 계속 산만하게 이어진다. 결국은 따져보아야 그 이야기에 그 이야기다.
‘대통령은 한 센텐스로 요약 평가된다’-. 한 미국 정치평론가의 말이던가. 대통령이 됐으면 그래도 뭔가 한마디로 평가될 게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링컨 하면 노예해방이 떠오른다. “루이지애나를 사들였다”-제퍼슨이다. 레이건은 냉전을 승리로 이끈 대통령으로 기억될 것이다.
한국의 상황에 대입해 보자. ‘군사독재, 유신체제’- 박정희다. ‘근대화, 경제발전’도 박정희의 이미지와 오버랩된다. 어떤 평가를 받을까. 역사의 몫일 게다. 현재로는 ‘경제발전을 이룩한 대통령’이라는 쪽으로 평가가 기울어 있다.
이승만 평가도 그렇다. 해외로 망명한 독재자란 오명에도 불구하고 공산침략으로부터 나라를 건졌다는 평가다. 이 두 대통령은 크게 보아 ‘공(功)이 과(過)를 덮었다’는 식의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DJ에 대한 평가는. 결국은 햇볕에서 시작돼 햇볕으로 끝나지 않을까. 햇볕으로 노벨상을 받았고 햇볕 때문에 끝없는 추락을 하고 있는 형국이니까 하는 말이다.
“이런 식이라면 우리의 민주주의 시대는 자칫 영국식 헌정(憲政)이 아닌 스페인식 내전(內戰) 심리로 치닫지 않을까 걱정이다.” 현 정치풍조와 관련해 한 비평가가 내뱉은 한탄이다.
아닌 게 아니라 한국은 목하 내전을 방불케 하는 상황에 몰입해 있는 것 같다. 동서갈등이니, 남남(南南)갈등은 이미 흘러간 옛 노래다. 정권의 버팀목이랄 수 있는 당(黨)·정(政)·군(軍)에서 난기류가 형성돼 심각한 내부 갈등을 보이고 있어서다.
‘민주당 국민경선은 사기극이다’-. 민주당 선거관리 위원장을 맡았던 중직자의 양심선언성(?) 폭로다. 집권당의 내분이 갈 때까지 간 것 같다. 바야흐로 내전상태라고 할 수밖에.
정(政)의 모습도 그렇다. ‘4억달러를 뇌물로 바치고 김정일을 알현했다’-. 메가톤급 의혹 제기다. 이 상황에서 전 대통령비서실장과 정부고위직을 지낸 산은총재가 저마다 딴 말이다. 법정소송도 불사하고 있다. 여차하면 내란으로 번질 기세다.
군(軍)이 보이고 있는 내부 갈등은 더 심각하다. 정복차림의 현역 군장성이 “이런 지휘부 밑에서는 차라리 옷을 벗겠다”며 공개적으로 성토하고 나섰다. 서해교전과 관련해 드러난 군의 현주소다. 역시 내란 반보직전의 상황이랄 수밖에 없다.
현 정권의 파워 베이스를 몽땅 흔들고 있는 이 내분은 햇볕이 그 뿌리다. 대통령은 햇볕에 취해 있다. 햇볕은 노벨상의 명예를 가져다 주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정권 재창출의 실마리도 햇볕에서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므로 햇볕의, 햇볕을 위한 정권이 되어야 한다.
오로지 햇볕에만 집착한다. 그러다가 결국은 난기류에 빠져들었다. 허구에 매달려 있던 결과다.
“러셀이 한 말이 있지. 성경의 인물 중 가장 과대 평가된 인물은 솔로몬일 거라고. 사실은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거야. 솔로몬 시절의 정치적 오류가 이스라엘 왕국 분열의 단서란 거야.”
“정치 9단이라는 DJ를 솔로몬에 비유하는 건가. 너무 과하잖아… 솔로몬이 왜 그렇게 된지 알아, 잔꾀를 부리다가 그렇게 된 거야. 하나님을 멀리하고 자신이 다 할 수 있다고 오만을 떤 탓이지. 그게 다 우상숭배지. 자네 그리고 보니 교회 안 나가잖아… 무슨 소리야. 유대지파만 돌본 탓에 지역감정이 나빠져 분열된 거지… 그런데 그것과 교회 나가는 게 무슨 상관인가.”
이야기는 결국 종교로 이어진다. 그러다 보니 새벽이다. 허둥지둥 헤어져 집으로 간다. LA에 사는 평범한 사람들. 그 한 모임의 시말기다.
옥 세 철<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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