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린 어페어즈(Foreign Affairs)에 한 논설이 실렸다. “미국을 상대로 한 항구적 협정이란 있을 수 없고 미국사회의 조화를 깨뜨리는 일은 바람직하다는 신념을 소련은 광적으로 신봉하고 있다… 소련은 파트너가 아니다. 근본적으로 적대 세력이다… 정상적 외교수준에서 협력관계를 갖는다는 건 불가능하다… 이런 소련의 팽창경향에 필요한 것은 효과적인 봉쇄정책이다.”
바이라인은 X로 표시됐다. 권위를 자랑하는 외교전문지 포린 어페어즈로서는 전례를 찾기 어려운 일이다. 이 논설은 그래서 ‘아티클 X’로 불려지게 됐다. 나중에 그 필자의 이름이 밝혀졌다. 조지 케난이다. 1947년에 일어난 해프닝이다.
케난은 소련 주재 미국 대리대사로 근무하면서 국무부에 장문의 보고서를 보냈다. 1946년 2월22일자 전문이 그것으로 당시 트루먼 행정부는 이 보고서를 공식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국무부의 승인 하에 그 보고서 내용은 익명의 형식인 ‘아티클 X’로 포린 어페어즈지에 발표된 것이다.
트루먼 독트린으로 명명된 전후 미국의 국가 안보전략은 바로 케난의 보고서를 기초로 한 것으로 냉전시기 미국 해외정책의 근간을 이루어왔다. 봉쇄론은 그렇지만 한 때 심각한 도전에 직면한다. 60년대 수정주의학파의 도전이다. 소련에 대한 과잉반응이 냉전의 원인이라는 주장이다.
봉쇄론은 그러나 결국 옳았음이 입증된다. 제2의 로울백 정책을 표방한 레이건 해외정책이 사실상 소련의 붕괴를 이끌어냈다는 결론과 함께 봉쇄전략은 평가를 받게 된 것이다. 만일 케난의 전략이 잘못됐다면 미국은 핵전쟁에 말려들거나, 공산화됐을 것이라는 게 이제와서의 가정이다.
‘누가 (다음 차례) 미국의 적인가’-. 소련이 붕괴된 후 한동안 유행을 탄 화두다. 이와 함께 내로라 하는 논객들간에는 한가지 보이지 않는 경쟁이 벌어졌다. ‘신판 아티클 X’의 저자가 되겠다는 야심의 발로다. 말하자면 냉전이후시대 미국의 대전략 수립 저자의 영예를 차지하겠다는 경쟁이다.
‘신판 아티클 X’는 그러나 이미 작성돼 있었다. 당시에는 잘 알려지지만 않았을 뿐이었다. 그게 1992년의 무렵으로 딕 체니 당시 부시 행정부 국방장관과 속칭 ‘그 일당’이 그 저자였다. 체니와 폴 월포위츠, 콜린 파월, 리차드 펄 등이 그 면면들.
이 ‘신판 아티클 X’는 한동안 철저히 무시됐다. 클린턴 행정부가 들어섰기 때문이다. 그 저자들은 싱크 탱크로, 대학으로 흩어져 나갔다. 광야생활을 통해 ‘체니와 그 일당’은 ‘신판 아티클 X’에 수정을 가하며 내용을 가다듬었다. 이들은 월스트릿 저널, 위클리 스탠다드 등 보수계 언론을 통해 광야의 소리를 전하면서 때를 기다렸다.
마침내 때가 왔다. W. 부시 행정부 출범과 함께 이들은 행정부 안보팀의 요직을 점거하게 된 것. 체니는 부통령이 됐다. 파월은 국무장관이고, 월포위츠도 요직에 기용됐다. 신판 ‘아티클 X’의 내용이 부분적으로 하나 둘 공개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전면 공개됐다.
뉴욕타임스의 최근 보도가 그것이다. 그러자 백악관은 공식적으로 이를 발표했다. 의회에 보고된 ‘미국의 새로운 국가안보전략’이란 31페이지짜리 문건의 형식으로 발표된 것. 그 내용은 그러나 이미 10년전 ‘체니와 그 일당’이 초안을 잡은 전략 보고서에 바탕을 두고 있다.
1차 ‘아티클 X’는 ‘억지(Deterrence)와 봉쇄(Containment)’를 전략의 요체로 삼고 있다. 2차 ‘아티클 X’는 선제공격(Pre-emptive Attack)이 전략의 키워드다. 냉전시대에 통하던 전쟁억지 전략은 이제 통하지 않는다는 판단에서 나온 개념이다. 따라서 강조되는 건 외교가 아닌 군사력이다.
봉쇄전략이나 선제공격론은 모두 ‘미국의 적은 악한 존재라는 도덕적 판단’에서 출발한다. 케난은 그러나 미국의 적, 즉 소련을 비이성적이고, 자살적 행동도 불사하는 위험한 존재로는 보지 않았다. 선제공격 전략 수립자들은 미국의 적을 한마디로 ‘미친 자’로 본다. 그러므로 극히 위험하고, 또 자살적 모험충동에 사로잡힌 존재’라는 인식이다.
‘아티클 X’가 발표된지 반세기. 봉쇄론은 결과적으로 옳음이 증명됐다. 케난은 ‘전후 최대의 전략가’라는 영예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제2 ‘아티클 X’의 저자는 그러면 어떤 평가를 받게될까.
‘역사가 판단할 것이다’-. 틀린 말이야 아니겠지. 그러나 그렇게만 말하기에는 뭔가 절박한 메시지가 ‘신판 아티클 X’에는 담겨 있다는 생각이다. ‘미친 자’로 간주돼 ‘언제든지 선제공격을 가할 수 있는 미국의 적’에는 김정일 체제의 북한이 포함된다는 강력한 시사가 들어 있어서다. 켈리 미특사의 평양방문 결과가 몹시 기다려진다.
옥 세 철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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